철학자의 죽음(22)-정몽주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 교수/ 철학박사

로마광장에서 화형을 당한 브루노와 차열(車裂)로 찢겨 죽은 상앙은 그래도 정식으로사형을 당한 경우이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채 살해된 철학자가 있다. 고려 말엽 공양왕 4,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성계가 병환 중에 있다 하니, 정몽주의 입장에서는 문병을 아니 갈 수도 없었다. 정세를 살피기도 할 겸, 그의 사저로 가기로 하였다. 성리학의 대가이자 만조백관과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정치계의 거목 정몽주를 맞이하여 술상 앞에 앉은 이성계의 5남 방원은 시 한 수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고저

이른바 하여가(何如歌)’로 잘 알려진 단가(短歌)이다. 정몽주 당신이 고려왕실을 버리고 신흥세력의 리더로 떠오른 내 아버지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떠보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참 좋은 시라고 덕담을 건넨 정몽주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이렇게 답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의 임금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심이 잘 나타나 있는 단심가(丹心歌)’이다. 서로간의 마음을 헤아린 두 사람은 말없이 헤어졌다. 주막에 잠깐 들러 술 한 잔에 시름을 잊어보려던 정몽주는 만수산(개성의 송악산)의 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자 이윽고 말에 올랐다. 무심한 말은 정몽주를 싣고 선죽교 돌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말이 다리 위에 다다르자 멈추어라!”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돌다리 위에는 판위위시사(왕의 행차를 호위하는 위시시의 우두머리로 정3품 관직) 조영규가 가로막아 서 있었다. 녹사(錄事-2품 이상의 대신들에게 배정된 시종)가 조영규의 몸을 안으려고 뛰어 덤벼들자 몸이 닿기도 전에 조영규의 철편(쇠뭉치)이 녹사를 힘껏 갈겼다. 녹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버린다. “, 대감. 이미 천명이 다했으니, 말에서 내려 철편을 받으시오.” 말에서 내린 정몽주가 태연히 조영규에게 다가서며 말을 던진다. “이시중 대감(이성계)이 나를 죽이라고 자네를 보내던가?” “이시중 대감이 시킨 게 아니라, 이 나라 삼천리의 명령이오.” “이 놈! 이 천하에 죽일 놈. 쥐새끼만도 못한 네 놈이 감히 천명(天命)을 사칭(詐稱)하다니…… 고려의 녹을 먹는 신자(臣子=신하)의 할 짓이 고작 이거더냐?”

그러나 조영규의 손에 들린 철편은 이미 원을 그리고 있었다. “정몽주의 입, , 눈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철편이 정몽주의 머리를 친 것이다. “에익!” 다시 한 번 뼈 부서지는 소리가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진 주위에 울려 퍼졌다. “이 놈! 이 역적 놈들.” 겨우 한마디 꾸짖는 소리가 쓰러지는 정몽주의 입 밖에 새어나왔을 때, 조영규의 철편은 세 번째의 원을 그렸다. 만고의 충신 정몽주가 선죽교 돌다리 위에서 털썩 쓰러졌다. 다리 밑에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원이 우르르 달려 나와 넋을 잃고 서 있는 조영규와 나란히 서서 장엄한 충신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날짜는 공양왕 4, 44일이었다.

포은 정몽주는 죽임을 당할 줄 알면서도 모친 이씨의 정의를 위해 죽으라!’는 말을 따랐다. 만고의 충절은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조선에서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그의 충절을 기려서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를 문묘에 봉사(奉祀-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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