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불통 철학자(6)-사르트르(2)

사르트르는 어렸을 적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부친은 사르트르가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후유증인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는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을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좋은 아버지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오래 살았다면, 그는 나의 머리 위에 군림하며 나를 억압하고 있었으리라…󰡓어떤 권위에 의해서도 짓밟히기 싫어하는 그의 기질은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부친을 잃은 사르트르는 10살이 될 때까지, 외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소르본대학교독문학 교수였던 외할아버지는 밀림의 성자로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의 백부(큰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어머니와 슈바이처 박사는 사촌 남매지간. 하지만 사르트르의 나이 열한 살 때, 모친이 재혼함으로써 이 시기도 끝나게 된다. 그는 또다시 낯선 환경, 의붓아버지 밑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유난히 자유를 주제로 한 것이 많은 까닭은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수재들이 모이는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지만, 학생들과 교수들을 멸시하였으며, 강의를 잘 듣지도 않았다. 또 단벌옷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녔으며, 주정뱅이로 보일만큼 술을 많이 마셨다. 스물두 살에는어느 패배라는 소설을 썼지만, 출판을 거절당했다.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자격 시험에는 낙방하고 말았다. 이 일에 대해 자신의 답안지가 너무 독창적이어서 그랬을 거라고 말했는데, 1년 후에 수석으로 합격한 것으로 미루어 그의 진단이 전혀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발령을 받은 그는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교장이나 동료, 학부형과 접촉하는 것은 매우 싫어했다.

어느 날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2년 동안 계약결혼을 해볼까요?󰡓라고 제안하였고, 보부아르(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여류작가) 역시 이에 찬성함으로써 일생동안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고, 생의 반려자가 된다.’고 하는, 유별난 동거관계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하였지만 2년 뒤 30세까지로 연장했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히틀러가 파리를 점령하자, 사르트르는 즉시 독일군을 겨냥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한다. 1943년에는존재와 무를 출간하는데, 이 책은 출간된 지 13년 만에 46판이라고 하는, 철학서적으로서 유례가 없는 대기록을 세우며 그를 단번에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전쟁이 끝난 후, 교직을 그만둔 그는 자유문필가로 활동하였다.

사르트르는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싸울 때는 자신의 모든 것, 곧 생명까지도 걸었다. 그는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반대하여 보부아르와 계약결혼을 하였으며, 두 사람만의 자유를 위하여 자식을 갖지 않았다. 사유재산 제도를 반대하여 호텔에서 잠을 자고, 카페에서 글을 썼으며,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그는 1946년에 집을 사서 1962년까지 사는 동안, 커다란 심리적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이유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그의 신조 때문이었다. 만약 우리가 철학자를 자기의 분명한 소신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 상관없이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 규정한다면, 사르트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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