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 강항선생 국제학술세미나가 지난 7일 영광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가 개최한 이번 세미나는 3명의 학술발표가 이어졌다. 첫번째는 무라카미 쓰네오 일본회장의 강항선생의 현창사업을 중심으로 발제했으며, 두 번째는 광주교육대 김덕진 교수가 죽창 정홍연 선생과의 우정으로 발제했다. 마지막은 전 조선대교수를 지낸 안동교 철학박사가 수은 강항 선생의 50제자의 학문적 고찰을 토대로 발제했다. 영광신문에서는 김덕진 교수와 안동교 박사의 발제문을 요약해 게재 한다. <편집자 주>

 

발제2 ‘죽창 정홍연 선생과의 우정

김덕진/ 광주교대 사회학교수,호남사학회 총무이사

강항(姜沆)은 본관은 진주, 자가 태초(太初), 호가 수은(睡隱)으로 영광에서 1567(명종 22)에 태어났다. 159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피랍되어 일본에서 억류 생활하다 1600년에 돌아왔다. 이후부터 1618(광해군 10) 생을 마칠 때까지 영광에서 19년간 살며 독서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에 반해 정홍연(鄭弘衍)은 본관은 동래, 자는 덕일(德逸), 호가 죽창(竹窓)으로 서울에서 수은보다 2년 앞서 1565(명종 20)에 태어났다. 그는 1593년에 여피란우해우 교거일항󰡔죽창집󰡕 3, 괴정기(세재계사 피란호남시 작).

이라 하여 왜란을 피해 영광으로 내려왔다. 둘째 아들이 1580년 생인 점으로 보아 가족과 함께 왔다가 영광군 백수읍 지산리에 정착하였다. 광해군 때에 선공감 감역, 제용감 판관, 거창현감, 양천현령, 동복현감, 익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624년부터는 관직을 그만두고 영광에서 살다 1639(인조 17)에 생을 마쳤다. 함평 출신의 유학 정색(鄭穡)이 죽창 만사에서 금서를 스스로 즐김은 타고난 소질이고, 시주(詩酒)를 무단히 바쁘게 하였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죽창은 영광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은(睡隱)과 죽창(竹窓)은 수은이 일본에서 돌아온 1600년부터 수은이 생을 마감한 1618년까지 영광에서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의 교유에 관한 연구는 당시 영광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수은의 영광에서의 활동과 아직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죽창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점을 알게 해줄 것이다. 특히 수은은 일본에 주자학을 전파한 인물로 알려져서 그에 대한 연구는 꽤 많은 편이지만, 지역활동에 대해서는 연구가 일천한 수준이다. 수은의 지역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김경옥의 수은 강항의 생애와 저술활동(󰡔도서문화󰡕 35,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2010)과 김덕진의 전라도 광양 수월정의 기문 지은이 분석(󰡔남도문화연구󰡕 30, 순천대 남도문화연구소, 2016) 외에는 없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그의 많은 제자들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던 점 등 많은 사실들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고 죽창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거의 없고, 󰡔영광읍지󰡕 본조음사 조항에 호가 죽창으로 동래인이며 대제학 사()의 후손이다. 군수를 지냈으며 지산(芝山)에 사당이 세워졌다.”

수은과 죽창은 깊게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치적으로 두 사람 다 서인(西人)으로 당색이 같았다. 수은의 제자로 서인의 대표 인물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죽창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기뻐서 지은 시가 있다.

수은과 죽창이 교유하였던 변충원, 임서, 임전, 김우급 등도 반광해군 인물이어서 한 때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지기로서 교유하였다.

죽창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에서 석아선군우 추수김석견 습지동취월 금곡공화연이라고 하였다. , 죽창은 나의 아버지 친구로서 서로 상종하시기를 금석과 같이 하셨고 달빛 아래에서 흥겨운 주연을 함께 즐기셨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두 분이 매우 가까웠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깊은 교유는 우선 서로의 제자지인을 상호 격려하고 지도하였다. 그리고 집안 간의 결혼으로도 이어졌는데 죽창의 손녀 사위, 즉 죽창 둘째 아들 광신(廣紳)의 사위로 강시경(姜時儆)이 들어왔다. 두 분이 교유한 흔적은 두 인물의 문집 속 창화 시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분석해 보겠다. 그러나 그 정도만 가지고는 교유의 폭과 내역을 밝혀내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필자는 두 분의 문인록(門人錄)이나 만사록(挽詞錄)을 교차 검토하는 작업도 진행해 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은죽창 지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대외활동에 대해서도 알아보겠다. 아직까지 기초적인 인적 사항마저 정리되어 있지 않아, 이 글은 후일의 수정보완이 필요함을 미리 밝혀둔다.

 

발제3 강항의 강학활동과 제자양성

안동교/ 철학박사,조선대교수,보성 대계서원 안방준선생의 직손

16009월에 고향으로 돌아온 강항은 대구교수와 순천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함으로서, 관직생활을 통해 자신의 도학을 구현하려던 꿈을 스스로 접어버렸다. 대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운제 마을의 서당에서 집안과 향촌의 자제들, 친구들의 자질들을 받아들여 강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강항은 이곳에서 다수의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그의 뛰어난 문장과 고고한 기절은 제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현재 강항의 문집에는 정돈된 제자들의 명부인 문인록이 실려 있지 않아 학맥의 전승과 교육의 파급 정도를 가늠하는 데 방해가 된다. 20여 년간 강학활동을 하면서 다수의 제자들을 배출했을 터인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문인록이 문집에 실리지 않은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다행히 근래에 강항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들의 정보를 알려주는 일종의 문인록들이 성첩 문서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첫째, 1824년에 후손 강태환이 작성한 은시록은시는 논어』 「선진민자시측 은은여야에서 따왔다. 강태환은 발문에서, 일찍이 진산세고를 기록하다가 제자들의 후손가에 탐문하기도 하고 수은집속에서 뽑아 적어서 삼가 명단을 만든다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제자로 추정한 69명의 성명, 자호, 과거시험, 관직, 본관 등 짧은 정보를 기록해 두었다.

둘째, 작자 미상의 수은문인록이다. 이 기록 역시 성첩 문서인데 아쉽게도 앞쪽 몇 장이 떨어져 나갔다. 누락부분을 빼고 62명의 성명, 자호, 과거시험, 관직, 거주지 등이 적혀 있고, 그 뒷부분에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지은 만시와 스승이 제자들에게 준 시와 만시를 수은집원집과 부록, 별집에서 뽑아 사제 관계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제 관계라고 확증할 수 없는 글들도 많이 추출이 되어 있다.

셋째, 1941년에 윤영선이 편찬한 조선유현연원도이다. 윤영선은 강항을 성혼의 학맥에 배열하고 그 문하에서 배출된 것으로 추정한 41명의 성명, , 본관, 관직과 품계, 생년 등을 나열하였다. 윤영선은 호남의 읍지를 위주로 강항의 제자들을 추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 자료는 모두 강항 사후 2, 3백년 뒤에 작성된 것들이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기초적인 문서이지만 문집에 문인록이 실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나마 소중한 자료들이다. 세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면 많은 숫자가 겹치는데 대략 85명 정도 된다. 그러나 앞으로 좀 더 세밀하게 방증자료를 대조해 보면 이 중에 강항의 제자로 볼 수 없어 삭제해야 할 인물이 약 2, 30명 정도 될 것으로 판단한다. 아래에서 인명에 밑줄을 친 인물들은 선, 후배이거나 동문, 친구, 벗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선 강항의 제자로 볼 수 있는 60여명만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먼저 지역적으로 보면, 강항의 제자들은 호남과 충청도 일부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그가 20여 동안 강학했던 거점을 영광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함평과 나주 출신의 제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강항의 제자 중에는 강항 사후에 발발한 정묘·병자호란에 창의하여 구국의 깃발 아래로 달려간 실천적 유학자가 매우 많았다는 점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도의 정신과 기절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과거 합격의 숫자로 보면, 소과에 응시하여 생원·진사에 오른 제자들이 20여 명이고, 대과에 급제한 제자들도 7, 8명 되며, 관직에 진출하여 고위직에 오른 제자도 적지 않다. 문집을 내지는 못했지만 관료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박안제·박안효 형제와 신응망, 임련과 임담 형제는 향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문집의 유무로 보면, 현재까지 약 9명의 제자들이 남긴 9종의 유고가 간행되었다. 고부민의 탄음고, 나해륜의 송도유적, 나해봉의 남간집, 신천익의 소은유고, 양만용의 오재집, 오희도의 명곡유고, 윤순거의 童土集, 이율의 오휴당유고, 정제원의 취우당집은 앞으로 강항과 그 제자들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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