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3)-정도전(2)

이 앞에서 이방원이 하나의 기회를 잡았다고 했는데, 그 기회란 정도전 등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뒤 단칼에 그들을 죽이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이에 방원은 자신의 사병(私兵)들을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기습하여 모두 죽이고, 세자 방석을 폐출하여 귀양을 보내는 도중에 죽여 버린다. 그리고 이어서 방석과 한 어머니를 둔 방번마저 살해하고 만다. 정도전에게는 종친을 모해했다는 죄명이 씌워졌으며, 그의 두 아들 정영과 정유는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가다가 살해되었다. 얼마 뒤 조카 정담은 큰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살했다. 오직 맏아들 정진만이 당시 태조를 수행하던 중이라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1차 왕자의 난이 마무리되자, 이방원은 짐짓 세자의 자리를 제2왕자인 방과(이방원의 친형)에게 양보한다. 이에 이성계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니, 이 이가 정종이다. 그 후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다. 이방원이 실권을 장악하긴 했으되 아직 라이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넷째 아들 방간이었다. 이 무렵 방간을 충동질한 사람이 지중추부사(2품 관직) 박포였다.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말을 꾸며낸 것이다. 이 말을 믿고 방간은 사병을 동원하였다. 이를 눈치 챈 방원 역시 사병을 동원하여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결국 이 싸움에서 방원이 승리하여 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사형을 당했다. 이후 14002월 방원은 세자로 책봉되고, 11월에는 왕위에 올라 제3대 태종이 된다. 한편, 자식들의 골육상쟁을 지켜본 이성계는 함경남도 함흥으로 떠나버린다. 이에 정통성에 흠집이 생긴 태종은 문안 사신을 자주 보내지만 이성계는 번번이 화살을 쏘아 이 사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만다. 여기에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의 충신정몽주는 기울어가는 종묘사직을 끝까지 붙들다가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반면에 그의 죽마고우였던 정도전은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도와 개국공신에 올라 화려한 시대를 열어갔다. 하지만 그 또한 격렬한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니. 이 두 사람 가운데 과연 누구를 더 높게 평가할 것인가는 그 시대적 상황과 평가자의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리라.

그동안 정도전은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정도전을 위한 변호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첫째,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정도전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한 일이고, 정도전이 왕자들을 암살하려 한 계략의 실체는 사실무근이었다. 둘째,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이 마지막에 이르러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방원이 역사적인 승자에 입장에서 그를 비열한 인물로 폄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1차 왕자의 난때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정도전의 장남 정진은 이후 복직되어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세종 때에는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865 고종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 뒤 고종은 정도전의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그 사당은 1986 4 경기도 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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