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는 반복의 연속이다” …1995년 24반 무예경당 입문 7단 고수

영광군농민회 문화패 꾸리면서 우도농악 명인 전경환 선생 제자

농악을 다루는 50대가 있다. 50대에도 몸은 날렵하다. 이맘때면 구성진 풍물 농악소리가 들린다. 지난 3일 영광읍 만남의 광장에서 무형문화재 제 17호 우도농악보존회 주관으로 제25회 공개행사인 영광마을굿행사가 열렸다.

14년 째 고향 영광에서 영광마을 굿 축전을 열고 있는 최용 우도농악보존회 전수관장은 2005년 우평마을을 떠올렸다.

1998년부터 영광 7개 마을을 찾아 꽹과리, 장고, , 징 치는 법을 가르치며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마을굿을 지낼 수 있도록 도왔던 그는 우평마을은 한국전쟁 때도 마을굿을 빠뜨리지 않았을 만큼 주민들이 당산을 진심으로 믿는 곳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평마을 사람들은 90년대 중반부터 굿과 풍물(농악) 등은 생략한 채 제사만 지냈다. 이농 등으로 음악을 연주할 인맥이 끊긴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우평마을 주민들에게 마을굿을 함께 살려보자고 제안했다. 우도농악보존회는 200511(음력 10월 정월 보름) 우평마을에서 우도농악 무형문화재 정기발표회를 열면서 주민들과 마을굿 복원을 시작했다.

1992년 전남대를 졸업하고 귀향한 그는 영광군농민회에서 문화패를 꾸리면서 우도 농악 명인 고 전경환 선생을 만나 제자가 됐다. 1995년 전통무예인 ‘24반 무예 경당에 입문한 그는 현재 7단의 고수.

최용 관장은 우연한 기회에 조선 정조시대 때 무사 백동수와 실학자 박제가, 이덕무 등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의 24반 무예를 접했다. 무예도보통지는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 왕조가 각종 무예(武藝)를 집대성해 그림()과 설명()을 곁들여 놓은 종합서(通志)이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운동권 출신의 최 회장은 대학 졸업 후 농민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고향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갔다.

당시 영광에는 핵발전소 4기가 가동중이었고, 정부는 원전 2기를 추가로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시민 환경운동단체들은 연합해서 핵발전소 추방 운동을 했다. 이들 운동단체는 운동의 구심점을 찾았고, 광주 임동규 선생의 제자가 됐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유신정권 말기 통혁당 재건기도 사건으로 무기형을 받고 수감 도중 다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돼 무기형을 받아 쌍무기수로 불렸던 임 선생은 10여년 동안 1.7평 감옥에서 책을 통해 무예도보통지를 복원했다. 칼이나 창 대신 빗자루로 무예를 연마해 빗자루 도사라고 불린 임 선생은 198812월 민주화운동에 힘입어 비전향으로 가석방된 뒤, 19893월 고향인 광주에서 경당을 세우고 24반 무예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경당은 고구려시대에 청소년들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치던 교육기관이었다.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상징이었던 임 선생과 합숙훈련 등을 통해 무예를 배운 최 회장은 건강한 삶은 단지 개인의 건강이 아니라 공동체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노력과 이웃과의 조화 속에 완성된다고 느꼈다고 한다.

출옥한 지 얼마 안 돼 외모에서 문약한 느낌을 주던 임 선생은 어른 남자 팔뚝 굵기의 대나무를 검으로 싹뚝 싹뚝자르는 무공을 보이기도 했다. “임 선생은 자주’ ‘자강’ ‘진취를 강조했어요.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흘러 내려온 전통적인 문화적 가치의 중요함을 무예를 통해 깨닫게 됐어요라고 최 부회장은 말한다. 나이 40에 국악에 빠져 타악기를 다시 전공하고 있는 최 회장은 하루 일과를 동네 아이들에게 전통무예를 가르치는 일로 시작한다.

최 관장은 청소년 20여명에게 전통 무술을 전수했다. 농악과 민요도 함께 가르치며 예()와 악()이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무예는 반복의 연속입니다. 사물의 변화와 역사의 발전을 몸으로 체득하듯이 무예도 끊임없이 반복 수련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최 회장이 다른 여러 병장기 가운데 무거운 월도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도 월도가 그의 성정과 비슷하기 때문이리라. “월도는 묵직하고, 우직하고, 듬직합니다. 세련되거나 빛나지 않지만 진중한 멋이 매력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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