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희/ 홍농노인대학장

1945815일 정오 일본의 124대 왕 히로히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사실 태평양전쟁의 종결이었다.

우리민족은 일제강점기 34351일 만에 해방의 기쁨을 안게 되었다. 우리의 힘으로가 아닌 국제관계 역학구조 속에서 다시 찾은 영광의 광복이었다. 내 땅을 내 땅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고 내 이름을 우리말로 쓰고 부를 수 없는 일제의 서슬 퍼런 핍박 속에서 완전히 풀리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귀국물결이 일렁거렸다. 시모노셰키, 상하이, 다렌,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강제징용자, 징집자, 망명자, 종군위안부 등 조국을 그리며 눈물짓는 300만 동포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귀향지는 부산항 제1부두, 1945년 가을 어느 날, 이 감격과 서러움, 희망이 교차하는 정경을 손로원이 노랫말로 쓰고 동양의 슈베르트라고 일컫는 이재호가 멜로디를 엮어 애달픈 노래를 세상에 내 놓았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도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이 크다. (귀국선 1)

1절은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오는 동포들의 감격을, 2절을 들뜬 마음을, 3절은 해방된 새날의 희망을 그렸다. 이 노래는 트로트 리듬 형식으로 처음 취입한 신세영의 앨범은 실패했지만 1952년 이인권이 재취입해 흥행에 성공했다고 전한다. 결국 이인권의 곡성탄가(哭聲歎歌)가 온 국민을 울린 것이다.

당시 35세였던 작사가 손로원은 1911년 서울에서 출생, 손희몽, 손영감, 나경숙 등의 예명을 사용하며 활동했다. 6.25전쟁 때는 단칸방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이국정서가 짙은 노래를 주로 만들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잘있거라 부산항’, ‘홍콩 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등이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1930년대에 활동을 시작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이 귀국선이 도화선이 됐다.

무엇보다 이 귀국선이 해방의 감격과 새로운 희망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역사속 귀국선에는 잊어서는 절대안될 참담한 비극도 담겨있다.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이 그것이다. 1945824일 패망한 일본은 해군함정 우키시마호에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을 태우고 부산항을 향해 출항했다. 하지만 이 함정은 그날 현해탄을 건너다가 원인모를 폭발로 침몰했다. 당시 일본정부는 폭발원인을 미군의 기뢰로 지목하고 귀국하는 한국인 524명이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73년의 세월 속에 묻혀있는 우리 근대사의 처참한 비극인데 지금까지 철저한 원인규명이 안 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참으로 아쉽고 서글픈 사건이 아닐 수 없는바 삼가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중가요는 사실 언어의 형식을 빌려 아기자기하게 마음속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 대중이 얼마만큼 공감하는지에 따라 그 인기가 결정된다. 인기에 따라 히트곡, 명곡 등으로 구분하는데 이들 중 시대와 세대를 관통해 부르는 곡을 국민애창곡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1927년 나온 낙화유수는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준 국민애창곡이라고 할 수 있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세울까? (낙화유수 1)

이 노래는 1927년 단성사에서 상영된 이구명 감독의 동명 무성영화 주제곡이다. 작사, 작곡, 가수가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다. 지금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사실 특종이었다. 이전 곡들은 대부분 창작가요가 아닌 구전가요나 번안곡들이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1호라고 부르는 것이다. 해방 후 가수 신카나리아와 황금심은 강남달이라는 제목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무엇보다 작사, 작곡은 당대 최고의 무성영화 변사였던 김서정이다. 그는 1898년 경남진주에서 유명한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김서정은 김영환의 예명인 것이 나중에 확인되었다.

그는 고향집에서 일어났던 기생과 화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서 영화 낙화유수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을 했고 1938년 조선일보 영화제 무성영화부분 10대 우수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가수 이정숙은 홍난파에게 동요를 배우던 학생으로 이구영감독의 친 여동생이다. ‘낙화유수라는 노래 제목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고변이 지은 시 방은자불우(謗隱者不遇)에 나오는 시구와 같다. ‘세속을 멀리하고 은둔중인 도인을 찾아갔다가 그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 온 사연을 읊은 시다. 낙화유수 인천태(落花流水認天台), 반취한음 독자래(半醉閒吟獨自來) ‘떨어진 꽃잎이 강물 위를 흐르는 것을 보면서 보다 넓은 세상을 알게 되고, 술에 반쯤 취해서 한가롭게 시를 읊으며 홀로서 돌아 왔다네.’

어쩌면 이 곡의 매력은 서정적인 노랫말이다. 진주남강 물결위에 찰랑거리는 달덩이를 내려다보는 화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물결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 우병사 최경회의 부인이던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힘주어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의암(義庵)이 있는 강물임을 모두 기억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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