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 수필가

흔히 쓰는 말에 송구영신(送舊迎新)이 있다. 묵은해를 보내고 신년을 맞는다는 뜻이다. 무술년에도 정유년에도 같은 말을 썼다. 경제나 공부가 쉬었다 가거나 끊겼다 다시 시작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신년에는 전혀 다른 해가 뜰 것만 같다. 12장 달력이 주는 위력이다. 날짜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지만 달력은 1231일을 11일과 정확하게 단절시키고 있다.

며칠 전, 지인이 마이산을 배경으로 여명을 촬영한 사진 장정을 부탁하면서 모필 글씨 한 점을 사진 하단에 추가해 달라고 했다. 여일지승(如日之昇)이란 글귀다. 떠오르는 해는 항시 같다는 글이다. 무술년이 기해년이 된다고 다른 태양이 솟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영신이란 말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담고 있는 희망일 것이다. 정유년은 황금닭띠였고 무술년은 황금개띠라고 했다. 그렇게 따지면 올해는 다시 황금돼지의 해가 되는 셈이다. 우리는 언제부턴지 모든 간지에 황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60년만이니 120년만이니 하면서 문헌에도 없는 황금띠를 만들었다. 한 해를 다시 시작하는 시점에서 황금으로 서민의 가슴에 희망을 조금이라도 더 심어주려는 암묵의 사회적 약속일 것이다. 나쁘진 않다.

연말이면 교수들의 사자성어 잔치가 있다. 최고의 관문을 통과한 판검사나 지성의 상징이라는 교수들의 인성을 신뢰하진 않지만 사회적 관심은 식지 않는다. 요즘 솔직한 심정은 이들의 인성뿐만 아니라 지성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인격을 다스리지 못하는 지식은 소경이 휘두르는 칼로 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요즘 돌아가는 사회적 상황이나 정의의 축을 가늠해보면 이들에게 인성결핍증이 있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교수신문에 발표된 올해 사자성어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다. 맡은 짐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뜻이다. 논어의 태백편에 실린 글이다. 2위는 밀운불우(密雲不雨)이다. 구름만 가득하고 정작 비는 내리지 않는다는 글귀다. 3위는 공재불사(功在不舍)로 순자에 나오는 글로 성공은 그만두지 않음에 있다는 뜻이다. 4위는 운무청천(雲霧靑天)으로 구름과 안개 속에서 푸른 하늘을 본다는 뜻이고, 5위는 좌고우면(左顧右眄)이다. 좌우를 둘러본다는 뜻으로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글귀이다. 모두 수긍이 가는 성어들이다. 특히 3위의 공재불사는 현 정부에 거는 희망을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다. 반대 정파와 견제세력이 만만치 않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야만하는 임중도원과 맥을 같이 한다. 절대 굴하지 않고 그만두지 않아야 성공한 정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미사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유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설교 했다. 그리고 마굿간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예수의 삶을 보며 물욕을 버리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새겨야한다고 했다. 너무나 친숙한 말이다. 바로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노자 할아버지의 위도일손(爲道日損)’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넘치는 물질과 식품의 홍수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현실이 언제부터 우리에게 다가 왔는지 모른다. 일 년이면 버려지는 음식물이 20조 원이 넘고 얼마 전까지 못 먹어서 병들었던 우리 몸은 이젠 너무 먹어서 죽어가고 있다. 세계의 식량 총생산량은 지구촌 전체가 먹고도 남는데 아프리카에선 수많은 아이들이 굶어서 죽는다. 넘쳐도 소유하려는 욕심과 남아서 버려지는 물건은 묘한 대칭을 이루지만 그만큼 물욕의 단위는 커지고 있다. 가장 하층민의 블랙홀처럼 텅 빈 소유의 공간을 채워줄 부유층의 아량은 없는 것일까. 부와 빈의 양극화는 내려놓음의 미학으로만 해결이 가능하다. 세상의 가장 바른 길은 내려놓음이요 비움이다. 바로 욕심의 상대점이다. 충분히 소유한 사람의 물욕은 더욱 커지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물욕은 소박하고 작다. 우리가 추구하는 최상의 도는 날마다 내려놓음에 있다. 교황의 설교는 예수의 삶을 보며에 정점이 있다. 예수는 가난했지만 물질을 탐하지 않았고 빈민의 병을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이병오어의 기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했다. 그리고 자신은 죄지은 자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았다. 요즘 기독교 성직자들의 모습과 판이하다. 말로만 감언이설하지 말고 예수의 행동을 실천해야 진정한 믿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확히 그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1년 전에 했던 설교는 천국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였다. 성직자들부터 솔선해서 물욕을 내려놓는 기해년이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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