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5)-하이데거(2)

총장 퇴임 이후 15년여 동안의 기간은 하이데거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정권으로부터는 불순분자로 취급되었고, 교내에서는 쓸모없는 교수로 분류되었다. 더욱이 50대의 나이에 라인 강변에서 참호를 쌓는 강제노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나치 정권 하에서 정부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던 하이데거는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군정(軍政) 치하에서는 정반대로 나치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강의가 금지되었다. 그가 다시 복권되어 강단에 돌아온 것은 19519월이었고, 명예교수로 물러난 것은 그 다음 해의 일이었다. 그 후로 하이데거는 현실적인 정치와 완전히 담을 쌓고, 강연과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물론 나치와의 관계에 대해, 하이데거를 변호하는 목소리들도 있다.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는 잠시 실수를 했을 뿐이고, 그의 저서는 정치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G. 해프너는 하이데거의 저서에 친() 나치적인 대목들이 분명히 있으며, 그것이 종종 길 위에 난 돌부리처럼 독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길이 좋은지 나쁜지를, 그 위에 돋아난 돌부리로만 판단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또 하이데거가 이른바 확신범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 독일민족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치즘에서 발견하여 그에 동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치의 만행 특히 유대인 대량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독일사회의 구조적인 에 따른 범죄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컨대,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 대학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낼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자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 계약권을 따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다. 또한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빼앗은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물론 하이데거가 개인의 입신출세, 영달을 위해 나치즘에 가입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치정권 치하에서 있었던 총장 취임은 그의 학문적 권위와 명예에 지울 수 없는 티로 남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문제를 떠나, 적어도 나치즘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는 점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 자신은 나치즘의 광기(狂氣)를 나의 철학으로 교화시켜, ()을 추구할 수 있다.”고 자신했을지 몰라도,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야스퍼스가 히틀러를 교양이라곤 없는 인간이라고 비판했을 때, 하이데거는 그게 뭐 중요하냐? 우아하기 그지없는 그의 손을 보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하이데거가 히틀러의 그 우아한 손만 보고 그 손에 묻은 피를 보지 못했다고 하는, 또는 못 본 척 했다는 것이야말로 그의 최대 실수가 아니었을까?

어떻든 나치즘과 하이데거의 관계가 20세기 역사와 문화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골칫거리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둘의 만남이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철학의 크나큰 스캔들로 남은 까닭은 하이데거의 명성과 나치즘의 악명(惡名) 모두가 엄청났기 때문이 아닐까?-하이데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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