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 수필가

지난 주말부터 이어지는 이슈가 다양하다. 솔직히 정신이 없을 정도다. 원래 시끄러운 정가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모습은 아니지만 이번 사안들은 대다수 국민의 분노를 유발하기에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다.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장자연 사건을 필두로 거물급 인물들의 별장 성접대 사건, 고급 룸 사롱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예계의 어두운 얼굴 등 가슴이 답답하다.

이러한 사건 사고가 기이한 모습으로 변형해 가고 있는 현실 또한 이해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특권층의 범죄는 언제나 제 모습을 감추고 정치정략으로 둔갑을 하기 때문이다. 특권층이 저지른 범죄가 왜 정치권 싸움으로 번져야 하는지 의문이다. 장자연 사건은 책임지는 사람 없이 기소 시효를 넘겼고 겨우 재조사를 한다지만 증인은 정말 힘없는 여자 동료 달랑 한 사람이다. 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증인 동참을 눈물로 호소하고 있지만 메아리도 들리지 않는 안타까움만 안기고 있다. 용기는 필망이요 비겁은 평안이다. 사회적 정의는 역사 속에서 이미 죽었다. 특권층의 범죄는 이렇게 숨겨지고 보호되면서 시기를 넘기고 묻혀져 왔다. 안타까운 우리 역사의 반복이다. 이러한 반복은 조선시대가 아닌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오히려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조선왕조를 좌지우지했던 노론의 후손들은 일본에 나라를 넘겼고 황국의 신민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식민사학자들은 혼까지 팔았다. 많은 국민이 목숨을 담보로 찾아놓은 나라는 어이없게도 다시 그들이 차지했다. 프랑스는 짧은 4년을 나치정권하에서 지냈지만 수천 명의 나치 협력자를 처벌했고 우리는 신기하게도 단 한 명의 매국노도 처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득세했고 나라를 찾기 위해 자신과 가족까지 희생해야 했던 사람들은 몰락했다. 민족적 비극의 시작이다.

1야당의 대표가 반미특위를 언급했다. 아무리 성장 배경의 DNA가 다르다지만 이해가 힘든 발언이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북한 김정은의 대리인으로 만들더니 급기야 반민특위가 당시 국론을 어지럽게 했다고 한다. 반민특위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고 어떻게 무너졌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음지를 모르고 성장한 그들에겐 필요치 않은 지식인 모양이다. 어차피 대한민국의 특권층은 법위에서 열매만 수확하면 되는 것이고 나라의 안위는 서민들의 몫이다. 역사는 그렇게 반복해서 흐르고 이젠 별로 이상하지도 않다. 성공회대 교수였던 신영복 선생은 “70세는 참회록을 쓰는 나이다. 해방 70년을 맞은 우리의 현재가 바로 그러한 때이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적 참회록을 누가 쓰느냐이다. 유력 야당의 입장에선 나라는 좌파가 장악했고 대통령은 북한 권력자의 대변인으로 전락했으니 참회의 주체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국민이 선출한 자국의 대통령보다 호시탐탐 제국군대의 부활을 노리는 일본 아베 수상을 더욱 신뢰하는 제1야당의 대표가 참회록을 쓸 수는 더욱 없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나라가 아닌 나라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사회학자 김동춘 선생은 그의 저서에 강자는 많은 권리와 자유를 누리지만, 약자는 굴욕과 비인간적인 삶을 감수하고도 제대로 항변조차 못하는 상황은 일제가 물러간 1945815일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민의 생명과 존엄성, 안전한 삶보다 권력자의 위신과 기업의 이윤이 언제나 중시 되었다고도 했다. 그랬다. 우리 서민은 오늘도 그렇게 살고 있다. 버닝썬에선 폭행을 당하고 신고한 사람이 오히려 인권까지 유린되며 체포가 되고 특권층 범죄자들은 검찰의 비호로 기소 기한을 넘겨 처벌을 면하고 있다. 이를 다시 거론하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되고 야당대표의 탄압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자칭 보수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반민특위가 무엇인지 모르듯 보수가 무엇인지 모른다. 안다면 차마 쓰지 못할 것이다. 한홍구 선생은 보수와 수구는 똥과 된장만큼이나 확연히 다르다고 한 마디로 정리한다. 현재 보수라 칭하는 부류의 근원은 결코 정통 보수가 될 수 없다.

김구 선생의 암살부터 장준하 선생의 암살까지를 마지막으로 정통 보수는 끝났다. 과연 이분들을 암살한 집단은 누구일까.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다시 반복되기 마련이기에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몇 십 년 주기로 어두운 역사의 데자뷰를 보고 있다. “강자는 권리와 자유를, 약자는 굴욕과 비인간적인 삶을 감수해야 하는 불변의 등식이 새삼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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