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 여민동락 살림꾼

종합병원의 아침은 보통 이렇다. 의사들의 회진을 알리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환자들이 일제히 침상에서 일어나 의사를 맞을 준비를 한다. 꼭 무슨 군대 점호 시간 같다. 회진중에도 의사는 환자랑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필요하면 환자에게 간단한 질문을 몇 가지 한다. 침상별로 의사가 환자에게 머무는 시간은 1~2분이 채 되지 않는다. 모든 병실을 한꺼번에 돌아야 하기 때문이다. 종합병원에 한 번쯤 입원해 보면 안다. 담당 의사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운지를. 늘 시간에 쫓기듯 진행되는 회진 시간에는 의사와 편안하게 대화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의사와 환자와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대단히 멀다. 그나마 가까이에 있는 간호사들은 어떤가. 화장실 갈 시간,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의 노동 강도에 시달리니 환자와의 관계에 정성을 쏟을 여유가 없다. 병원은 효율성을 위해 정해놓은 규칙대로 기계처럼 돌아간다. 대형화되고 선진화된 병원일수록 인간미는 사라지고 시스템만이 남는다.

여기 현대적인 병원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한 병원이 있다. 약물 과다 투여와 과잉 진료 대신 환자의 자연치유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느린 의학'의 놀라운 능력이 발휘되는 곳. 과도한 서류와 행정업무 대신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의료진과 환자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마을을 이루는 곳. "거주자가 최우선이다"라는 모토 하에 병원 전체가 '간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이곳은 미국의 마지막 남은 빈민구호소인 샌프란시스코의 공공병원 '라구나 혼다'이다. 높은 의료 장벽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고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라구나 혼다''신의 호텔'이라고 불린다. <신의 호텔>의 저자이기도 한 내과의사 빅토리아 스위트는 임시직으로 두 달만 머무를 예정이었으나 '라구나 혼다''느린 의학'에 매료되어 20년을 근무했다. 빅토리아 말고도 이 병원의 의료진들은 1~2년 있으려다 수십 년 눌러 앉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들을 잡아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0만 명 당 1명 꼴로 발병한다는 급성 횡단성 척수염을 앓는 환자는 극심한 감염과 욕창으로 최악의 상태를 보이다 결국 '라구나 혼다'에 왔다. 이 병원의 의사들은 죽어가는 화분을 살리는 것과 같이 환자의 자연적인 치유력을 가로막는 요인들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방식으로 환자를 돌본다. 먼지, 불결함, 냄새 나는 옷, 불필요한 약 처방, 두려움, 우울증, 절망. 이 모든 것이 환자의 자연치유력을 가로막는다. 필요한 것은 평화와 휴식, 그리고 시간이다. 환자의 몸에서는 어느새 썩은 부위가 문드러지고 새 살이 돋기 시작한다. 갈 곳 없는 희귀병 환자가 넘쳐나는 '라구나 혼다'에서는 '흔치 않은' 기적이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 주립병원에서 거부당해 아무리 갈 데 없는 사람이라 해도 '라구나 혼다'에 오면 그를 위한 자리를 찾아 줄 수 있었다. 개방형 병동에서 의사들은 매일 환자를 찾아갔고 간호사들은 세심한 간호를 했다. 환대의 정신, 공동체 정신, 자선의 정신을 중요시 하는 '라구나 혼다'에서 정성을 다하는 간호만으로도 환자의 상태는 호전되거나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다.

물론 '라구나 혼다'도 효율성을 내세운 구조조정의 압력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의료진이 줄어드는 만큼 많은 환자들도 병원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구조조정을 따르면서 병원이라는 하나의 마을 안에서 재현되었던 의사와 환자, 환자와 환자 사이의 작은 이웃 관계도 단절되어 갔다. 이 변화 앞에서 빅토리아는 "과연 신의 호텔의 정신이 죽을지, 아니면 살아남을지 알수 없다"고 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티베트 '라다크 마을'이 신자유주의 개방의 파고 앞에 무너지는 것을 목도했듯이 '라구나 혼다'도 고유의 정신을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의료 민영화를 밀어부친다는 것은 '라구나 혼다'와 같은 병원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효율성이라는 '정언 명령'이 지배하는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의 노동 강도는 더욱 세지고 환자와의 관계는 단절될 것이다. 돈의 많고 적음이 환자가 병원 문턱을 넘느냐 못 넘느냐를 좌우한다. '인간 중심 의료'가 아닌 '돈 중심'의 진료가 불러 올 비극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99%가 아닌 지불능력이 있는 1%뿐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돈벌이 목적의 영리 병원을 반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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