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자녀(8)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 헤겔(1770~1831)35세 되던 해, 예나대학의 원외교수로 채용된다. 2년 후에는 그의 주저라 할 수 있는정신현상학이 출판된다. 이 무렵 살고 있던 셋방의 주인이 사망한 후, 헤겔은 그의 아내 샬로테와 정을 맺어 아들(사생아) 루트비히를 얻는다. 그리고는 41세 때 20년 가까이 연하인, 명문집안의 처녀 마리 폰 투허와 결혼을 한다. 이듬해 둘 사이에 큰딸이 태어나지만, 수 주 만에 죽고 말았다. 하지만 그 후 한 살 차이로 태어난 두 아들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장남은 역사학자가 되고, 차남은 기독교의 종교국장을 지낸다.

한편, 사생아 루트비히는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헤겔의 집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이복(異服) 동생들과도 자주 싸웠다. 그러다가 얼마 후 집을 나가버렸다. 그는 나중에(1826) 네덜란드의 외인부대(外人部隊-외국인으로 편성되어 있는 부대)에 입대하여, 결국 18318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과연 헤겔이 그 일에 대해 얼마만큼 슬퍼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틀림없이 엄청난 슬픔에 휩싸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헤겔은 아들이 사망한 지 3개월 후, 급성 콜레라로 급사(急死)하고 만다.

노년의 프로이트(1856-1939,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심층심리학 및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는 손자를 잃는 아픔을 겪는다. 더욱이 그는 그 무렵, 턱에 암이 생겨 서른 세 번의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 와중에 사랑하는 손자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 슬픔이 오죽했을까? 이때 그는 목을 놓아 울었는데, 그가 눈물을 흘린 사실이 알려진 것은 생애를 통하여 이때뿐이라고 한다.

일찍이 프로이드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오이디푸스(불길한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그리스 신화 속의 왕) 콤플렉스아들이 아버지를 적대시하고, 어머니를 좋아하는 본능의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두 살이 좀 지났을 무렵, 어머니의 나체를 보고 강하게 마음이 끌렸다고 고백한 이 정신분석학자는 어머니를 사이에 둔 채, 아버지와 사랑싸움을 벌였음직도 하다. 그런데 자신의 손자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애정을 보여주고 있으니. 어떻든 턱 수술을 받은 뒤에도 그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음식을 먹기가 어려웠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 역시 손자로부터 온 충격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손자 루시안 프로이드(1922~2011)는 현대 미술시장에서 최상위의 화가로 손꼽혀 왔다. 평생 할아버지의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았던 그는 자화상(自畵像)을 비롯해 벌거벗은 알몸을 즐겨 그렸으며, 그림 속의 살코기 같은 몸을 통해 인간의 동물적인 면을 표현하였다. 그 결과, 2008년 그의 누드화베너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생존 작가로서는 최고가(350억 원)로 낙찰되었고, 2013루시언 프로이드에 대한 세 가지 습작은 경매사상 최고가인 약 1,528억 원을 경신했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