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성인의 제자들(석가모니①)

앞 호에서 우리는 공자의 제자들 외에 그 스승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과연 석가모니에게도 스승이 있었을까? 우선 그의 성장과정과 출가에 대한 부분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의 손에 자라난 싯다르타 태자(왕자)는 뛰어난 지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하지만 그 지혜에는 한계가 있어, 궁전 안의 안락함이 인간 삶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궁을 나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운명에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이 무렵, 아들의 심경을 눈치 챈 정반왕은 혹시 아들이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출가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16세의 나이에 골리 왕국의 공주 야쇼다라와 혼인을 하도록 하였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태자는 아들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 하여 이름을 라훌라’(‘장애가 된다라는 뜻)라 지었다. 정반왕은 많은 미녀들을 시켜 밤낮으로 향연을 베풀기도 하였으나, 이것이 오히려 태자의 출가를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29세 되던 해의 어느 날 밤, 태자는 가족에게 무언(無言)의 이별을 고한 채 출가하였다. 싯다르타 태자는 시종(侍從) 차닉을 데리고, 백마를 몰아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 후 시종과 헤어진 다음부터 태자는 머리를 깎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구걸을 하면서 남쪽의 마가다 왕국을 향하여 나아갔다. 당시 마가다 왕국의 서울 왕사성은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고, 많은 수도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브라만교(베다경전을 근거로 성립된 종교)의 수행자로부터 요가를 배웠다. 그러나 역시 정신적인 만족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번에는 네란자나 강 근처에서 단식(斷食-음식을 끊음)과 불면(不眠-잠을 자지 않음)의 고행을 하였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 왕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귀국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태자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부왕은 아들이 돌아오게 하는 일을 단념하고, 5명의 현자를 뽑아 태자를 수행하게 하였다. 이 기간이 6년이었는데, 태자는 이러한 육체적인 고행도 효험이 없음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고행을 같이 하던 5명의 수도자들도 그의 곁을 떠나갔다. 태자는 목욕을 하고 심신을 맑게 한 다음, 동네의 한 처녀가 갖다 준 젖과 을 마시고 체력을 회복하였다. 이후 부다가야 근처에 있는 우루베라 촌의 보리수 아래에서 동쪽을 향하여 좌정하고 길상초(吉祥草)로 만든 방석 위에 앉아, ‘내 앞으로 번뇌가 다하지 않으면, 영원히 일어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큰 결심을 하였다.

정진을 거듭하던 어느 날. 35세 되는 해의 128일 이른 새벽녘. 동쪽 하늘의 계명성(啓明星-금성) 빛을 바라보는 순간, 태자는 인생의 모든 어리석음(無明)을 없애고 홀연히 모든 것을 깨달았다. 이른바 금강좌(金剛座-‘굳고 단단하여, 어떠한 번뇌라도 능히 깨트릴 수 있음을 표현한 말)에 앉은 지 77일 만에 대각성도(大覺成道-크게 깨달아 도를 이룸)한 것이다. 이때부터 석가모니로 불린 태자는 지난날 함께 고행하던 5명의 수행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바나레스 외곽의 녹야원(鹿野苑)을 방문하였다. 그들 5명은 고행을 멈춘 태자를 비웃었다. 하지만 이내 쾌락과 고행의 양쪽 극단을 물리친 중도(中道)의 설법에 감동을 받았다. 석가모니가 최초로 선교를 한 곳이 녹야원이며, 이 사실을 초전법륜(初轉法輪-최초로 불법을 가르친 일)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다섯 명의 비구(比丘-출가한 남자승려)가 생겨나면서, 초기 불교교단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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