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는 지난 519일부터 4일동안 일본 교토시 용곡대학교에서 수은강항선생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는 무라카미 츠네오 강항선생 일본연구회장과 광주교육대 김덕진교수가 역사의 진실을 밝혔다. 본지는 이번 일본 학술세미나 탐방기를 2회에 걸쳐 요약 게제한다. <편집자 주>

 

수은 강항의 간양록한 권이면 참과 거짓의 학문적 규명이...

 

필자는 문화재학을 전공을 하는 사람이자 강항선생의 국내연구가로서 간양록과 강항휘초, 적중봉소, 강감회요, 운제록, 잡지 등을 배경으로 지난 2014년도부터 스승의 나라 강항, 제자의 나라 후지와라 세이카의 케치플레이즈로 열정을 갖고 성의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제법 진실된 역사와 왜곡된 역사를 안다고 자부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동안 국내에 머물었던 국제학술세미나를 매우 열악한 조건을 갖고도 일본에서 개최하게 하였고, 언론에 주목을 받지 못한 강항선생의 업적을 국내에 주목을 받게 해 이젠 포로로 끌려간 그 일본 땅 심장부인 교토시에서 개최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도 못한 일부 발제자의 어긋난 발제와 토론에 결코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런 엄정한 사유로 제일 먼저 손을 들어 질문자로 나섰다. 속으로 침착해야한다고 수없이 외치고 흥분하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이고서 무대 앞에 섰다.

마이크를 잡고 질문을 하려는데 메모했던 내용만은 더 뚜렷하게 보였지만 침묵의 1분은 얄밉게도 마치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 밖으로 아무 말도 이어가지 못하게끔 감성이 먼저 일어서고 말았다.

좌장을 맡은 김용의 교수가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격려의 박수를 유도해 냈지만 흐르는 눈물만 앞을 가릴 뿐이지 결코 도움이 못되고 있다가 겨우 진정이 되어 오카야마교수와 김덕진 교수에게 질문하겠노라고 말하고 먼저 오카야마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난 달 31일에 먼저 받은 발제문에 너무 고마웠다고 말하고는 발제문에 도달되지 않은 뜻밖에 발제라서 순간 당황 했노라며 역지사지하면 가장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질문을 하겠노라고 겨우 운을 떼 말했다.

발제를 한 선생의 아들과 딸 2명을 포함해 어린 조카 3명을 거느적 거린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고서 400여년이 흘러간 지금 선생 앞에 그 자가 서있다면 그를 선생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또 포로의 신분으로 피노된 입장에서 친화력이 있어서 주변의 덕을 많이 입고 조선으로부터 높은 관직까지 올랐으니 그냥 포로가 아니라 성공한 강항선생으로 28개월 만에 꿈에 그리던 영광땅 고향에 까지 돌아가게 되었으니 누구나 부러워 할 만큼 행복한 삶이 아니었겠냐는 막말성 발제에 질문하려고 하였으나 방청객에서 소란이 일어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 무렵 또 다른 질문을 받아야 하는 김덕진교수는 아예 세미나장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추가 질문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고 금 같은 시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폐회 후 한 밤 긴급 대책회의

열띤 세미나 진행 등으로 이미 시간은 5시가 훨씬 넘어가고 있었으며 순식간에 입소문으로 발제자와 토론자에 대한 항의성 질문내용이 퍼지고 이런 발제자와는 다과회를 가지면서 축배도 의미가 없어 강용희 선생에게 폐회관련 다과회는 생략해야 겠다고 말했고 기념촬영을 갖자는 집행부의 의견도 무시하고 버스로 이동해 가기로 했다.

고베시청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비빔밥 만찬을 하면서도 열띤 토론이 이곳저곳에서 삼삼오오모여 발제자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고 다카마츠 호텔에 투숙하면서 집행부 관계자를 찾아가 향후 대책을 급히 의논했다.

온천으로 유명한 호텔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도 좋아하고 매일같이 즐기는 사우나는 생각조차 못하고 분기탱천해 새벽녘까지 잠을 못 이루고 말았다.

 

그래도 새로운 아침은 밝아온다

아침 8시에 버스로 오즈시민회관 행사장으로 이동해 가면서도 최금환 조이여행사 대표의 입담은 그의 고급 진 사고방식과 뛰어난 발상의 전환이 잘 버무러져 42명의 탐방객들을 들었다 놓았다를 거듭했다.

1030여분에 오즈시민회관에 도착되었고 준비된 큼직한 국화 한 다발을홍유 강항선생 현창비에 헌화하는 식을 갖고 2층 추모식장으로 오른다.

오즈시청에서는 각 참석자에게 흉화를 모두 패용해 주고 식장에는 커다란 우리 측 추모 플랑과 오즈시청에서 준비한 현수막이 식장에 어울리게 게첨 되어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추념식을 갖기 전 실크하우스 이미승원장은 한복연구가인 후배와 함께 재빨리 선비복 5벌과 풀피리 연주복 1벌을 준비해 내빈들의 품격을 높이 세워 격식에 맞게 잘 대처가 되었다.

이윽고 추념식은 사토회장의 진행과 최금환대표의 통역으로 오즈시청측 합창단의 홀로아리랑과 앵콜곡으로 고향의 봄을 들었으며 답가로 역시 양철단장의 풀피리연주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오즈시청 부시장의 환영사에 이어 최흥렬 내산서원장은 추념사에서 어제 19일의 국제학술세미나에 이어 오늘 20일 수은강항선생의 400+1주년 추념식이 개최되어 오즈시장을 비롯한 오즈시청 관계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앞으로 민간차원의 활발한 한일관계 개선의 도화선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히 최 원장은 강항선생이 포로로 끌려와 판액이 된 종오소호 [從吾所好]사자성어 뜻을 묻는 MBC방송 취재기자와 인터뷰에서 여기까지 동행한 오카야마교수가 자를 풀어 고향으로 가고 싶은 간절한 강항선생의 마음이다라고 하는 설명을 비웃듯 정색을 하며강항선생은 피노되어 한 많은 삶을 살며 때때로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렸지만, 그때마다 죽음을 불사하는 선비정신을 갖고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표표하게 살았기에 포로의 신분일망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독야청청하며 굴복하지 않는 자신만의 옳은 길로 나가고자 한 일편단심의 마음이라고 엄숙하게 설명했다.

추모식이 끝나고 출석사(솟세키사)의 주지스님이 탐방객들을 기다린다는 말에 25인 버스 2대로 갈아타고 소로로 편도길인 오즈시에서 5KM가 넘는 언덕 산길을 힘들게 올랐다.

420 여년전에 수은강항선생과 교유했던 호인스님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주지스님의 인사말을 들은 후 스님의 독경으로 호인스님에게 우리가 모셔온 수은 강항선생과 재회하도록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최금환 대표와 사토회장의 닮은꼴

최금환 대표의 강항선생의 고난의 행적지 욕심이 사토회장과 통해 오즈시에서 한참 떨어진 폭포수 동굴을 찾기로 했다. 당시 강항선생은 이 곳 폭포 동굴에서 식솔들과 탈출을 도모하다가 사로잡힌 곳으로 왜국인 처형장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당시 왜국의 수도인 교토에 까지 높은 학문의 경지가 소개되어 급박한 상황속에서 목숨을 건지신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사토회장을 비롯한 피스로드인 에이메 단체회원들은 똘똘 뭉쳐 시간의 촉박함으로 오찬을 도시락으로 대체한 한국 손님들을 위해 만찬만은 일본 정식으로 품위있게 대접해야한다고 이 지역 특산물로 유명한 돔회 정식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23일의 여정이 끝나고 이젠 헤어져야 할 시간인 만큼 서로간에 할 말이 많았다.

강대욱 이사장은 여건이 성숙해 지면 올해 말 피스로드인 에이메 단체를 대한민국 영광에 초대를 하겠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늦어도 20205월중에 초대해 민간차원의 외교를 전개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피스로드인 에이메 사토회장의 인사말과 목이 사무차장, 도쿄지회장으로부터 강용희 선생이 홀로 열정적인 봉사활동에 뭔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하며 감격을 대신했다.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못했던 흥분을 가라앉히고 여기에서 대신 양 단체의 사진촬영을 하고 모든 행사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음에 상호 만족해 했다.

한 기념사업회 관게자는 어제 국제학술세미나가 100점 만점에 70점이라 한다면 오늘 추모제와 만찬까지 이어지는 프로그램은 100점 만점에 110점이라면서 감격해 했다.

역시 최금환대표는 여기에 밀리지 않았다. 만찬을 제공하겠다는 사토회장 몰래 그네들의 만찬비용까지 모두 결재했노라고 버스에 올라 토로해 더 큰 박수를 받고 만다.

 

34일간의 짧은 일정, 그래도 보람 가득함

오이타공항에서 1시간 20여분밖에 걸리지 않는 비행기로 언제 국제학술세미나를 했느냐 싶게 뱃부여행을 끝으로 무안공항에 도착해 모두가 34일간의 짧은 일정에 대한 섭섭함만 토로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일간 학문의 전쟁을 이미 치밀하게 19세기부터 우리나라 전국 유명 대학교에 점령해 설치된 퇴계학연구소에 수많은 어용학자와 친일교수가 넘쳐 두리 뭉실하게 넘어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수은 강항의 간양록한 권이면 참과 거짓의 학문적 규명이 다 보이는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친일과 어용으로만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방황만 하고 있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서 불현 듯 차창 밖으로 광주시내가 들어오는데 초여름의 맑은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빛고을의 광주가 유달리 밝게 보여 천년의 빛 영광과 함께 이 시대의 영웅을 만나고 와 시나브로 스승의 나라 강항을 우리 국민들에게 드리기로 한다.

623일 공휴일의 아침을 맞이하면서 나름 보람된 수은 강항선생 일본 교토 국제학술세미나의 탐방에 여독이 풀려 몸이 개운하고 아침이 상큼하다.

이제 영광으로 가셔야죠?!’하면서 운전하고 내려가는데 어릴 적 처음 차를 탔을 때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신기하리만큼 가로수나무들이 차례대로 질서정연하게 차창을 지나가는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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