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서리를 뜻하는 백로도 지나고 계절은 가을의 입구로 들어섰다. 뜨거웠던 불볕더위를 뒤로하고 벌써 밤이면 창문을 닫아야 한다. 느린 듯 다가오던 시간은 우리 곁을 스치는 순간 무섭게 멀어진다. 그래선지 우리 생각은 다가올 한 시간보다 지나간 5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게 훨씬 빠르다. 고단한 삶의 무게에 억눌린 기억들은 자신의 가치마저 돌아볼 겨를이 없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이렇게 자신의 현재 위치와 나이마저 망각하고 산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각도를 자신을 중심으로 잡는다. 그리고는 (시기)’를 잃는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때를 배제하지 못한다. 잉태와 태어남 역시 때의 기적이다. 특히 잉태의 확률은 순간의 기적이다. 이렇게 인간은 때가 되면 학교에 입학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을 한다. 군대와 직장의 퇴직 등도 모두 때가 되었음이다. 어찌 보면 는 삶의 연속이고 삶의 방법인 ()’와 통한다. 다시 말해 때를 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삶의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물러나야할 시기다. 때를 아는 퇴장 이상 아름다운 모습은 없다. 그래서 적절한 시기를 안다는 것은 도와 통한다. 공자의 손자 자사는 중용을 지어 유학의 정수를 남겼고 주자는 중용의 요체를 풀어 공부의 방향을 제시했다. 요약하면 밝은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고 실체는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불가분이다. 본래의 선한 마음을 간직하고 잘 길러 살펴야 하고(存養省察) 배우는 사람은 외부의 사사로운 유혹을 제거하여 본연의 선함을 몸과 마음에 가득 채워야 한다.”는 설명이다. 자신을 살피는 밝은 성찰은 하늘이 내린 밝은 도의 근원이다.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반환점을 오래전에 돌아버린 어리석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때를 부정한다. 혹은 전혀 느끼지 못하거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현재 자신이 처한 시간을 알지 못하고 물러날 때 역시 느끼지 못한다.

앞만 보고 살면 삶이요 뒤를 돌아보면 인생이라고 했다. 그냥 사는 것과 사람이 사는 것은 이렇게 다르다. 인간은 이성을 기둥으로 삼은 생각을 중심으로 살지만 테두리의 한계는 각각 너무나 다르다. 생각과 깨달음의 영역이 많은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차이 만큼이다. 타고난 밝은 도의 근원을 밝혀 덕으로 승화시키는(明明德) 공부가 부족함이다. 성찰의 부족은 욕심으로 나타난다. 밝은 덕과 이성의 천적은 바로 욕심이니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도의 근원은 욕심 앞에서 먼지 쌓인 거울처럼 빛을 잃는다. 그래서 자신을 비춰볼 방법이 없고 가장 중요한 때를 잃는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망이었던 인물이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정치라는 욕심의 낚싯바늘을 덥석 문 순간 때를 어겼다. 만일 유엔사무총장이 마무리였다면 그는 영원히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때를 알고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국영방송의 일요일 12시 노래자랑을 보면서 노욕(老慾)’을 생각하는 것이 나뿐일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과도한 노익장은 아름답지 않다. 주위에서 추켜세워도 때는 본인이 알아서 정해야 하는 법이다. 후배들의 공경은 지극히 형식적인 예의임을 알아야 한다. 그만두라는 언지가 없다는 이유로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려는 생각은 너무 저급하다. 타의에 의해 물러날 때를 정하는 것은 그만큼 추해진다. 평생 쌓아온 명성은 때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이승만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랬다. 욕심이 를 가리니 혜안을 잃은 것이다. 요즘도 이들처럼 때를 잃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중용은 외부의 사사로운 유혹을 제거하여 본연의 선함으로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라고 했다. 여기서 유혹은 욕심이다. 노자 할아버지와 법정 스님은 내려놓으라고 가르쳤다. 내려놓을 것은 당연히 욕심이다. 무소유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쩌면 물질보다 마음의 욕심을 더욱 경계하는 말이겠지만 물질은 너무 강한 유혹이다. 비슷한 내용의 방하착(放下着) 역시 절간에서나 통하는 말이다. 나이만큼 느는 것이 욕심이라면 인생은 실패다. 욕심은 불만족 그리고 불행과 형제다. 비울수록 만족과 행복이 형제로 찾아든다. 그리고 때를 알게 한다. 선동열과 가수 패티 김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물러났다. 노화된 팔과 성대로 전성기의 자신까지 욕보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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