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 수필가

가을이다. 이때쯤이면 계절 유행가처럼 다뤄지는 것이 책이다. 그만큼 독서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춘 계절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시끄럽고 복잡한 정치 이야기를 벗어나 참살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양서를 찾아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물질은 풍요로워지는데 생활은 여유가 없어지고 있다. 이상한 현상이지만 사람의 정서를 이해하면 궁금증이 풀린다. 배는 부르지만 마음이 고픈 것이다. 무엇이 우리 마음을 짓누르는 것일까. 사회의 구조 때문이지 않을까.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순간 거친 경쟁의 마당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 결코 과장이 아니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학습 경쟁은 어린 아이들을 미래 무한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다. 아이도 고달프고 어른도 고달프지만 인생 서바이벌에서 밀리면 도태 된다는 강박은 사정없이 어깨를 짓누른다. 최근 발표에서도 한국의 청소년은 OECD 국가 중 행복도가 가장 낮게 나왔다. 그럴 것이다. 시험만을 위한 공부와 경쟁은 행동과 생각의 자유를 빼앗았고 정서는 가뭄에 논밭 마르듯 갈라졌다. 마음엔 조금의 여유도 없고 생각은 오직 친구를 이기는 것뿐이니 행복이 들어갈 자리는 애초에 없다. 어쩌면 생각 자체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시험을 치르는 기계가 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모르는 부모는 없다. 하지만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어른도 없다. 이를 위해선 내 자식의 경쟁권을 포기해야하는 희생을 치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학벌과 가방끈으로 결정이 되니 결코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함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약점이다.

며칠 전, 친하게 지내던 선배 지인이 갑자기 소천 하셨다.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항상 이별은 필연이기에 다시 못 봄이 안타까울 뿐이다. 평소에 융통성의 부재로 조금 휘둘렸지만 그만큼 정직하게 세상을 살았던 분이기에 서운함은 더욱 크다. 자식 교육에 성공한 분이지만 당신이 한 일은 없다고 한다. 자녀들의 공통점은 바로 책을 읽는 습관이었고 결과는 자신들이 원하는 학과를 택해 진학하고 전공을 살려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평소의 독서 습관이 가장 좋은 공부라는 결론이다. 학교에서 그리고 방과 후에는 학원에서 시험을 위한 외길만을 파는 아이들보다 우수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방법이 독서였다는 이야기다. 아마 꾸민 말은 아닐 것이다. 비슷한 사례를 여러 곳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활자의 세계를 마법의 공간이라고 표현해 본다. 학부모 입장에서 지상 최대의 과제인 학습 능력을 극대화시킴은 기본이고 감성과 지성 여기에 판단력까지 덤으로 주는 독서의 위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것은 성적이니 참고서를 벗어난 외도(?)는 너무 위험하다. 그래서 입에 달고 사는 게 공부 안하냐?’라는 말이다. 5천만 인구 이상의 국가에선 6, 전체에선 11위를 달린다는 경제국가에서 행복의 성적이 말이 아니다. 어쩌면 독서의 인식과 맞물려 있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책과 가까이 할 수 없는 이상한 교육 제도에서 허덕이는 우리 청소년들이 행복지수가 최하위인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코스모스와 10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유행가를 동반한 독서의 계절이라는 식상한 유행어마저 오히려 절실한 것은 바로 감성을 잃은 우리 아이들의 메마른 정서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책이라는 존재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는 마법의 공간이다. 삶에 필요한 양식을 빠짐없이 갖춘 종합 백화점에서 활자로 만들어 나누어 준다는데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함은 사회적 구조가 조금은 엇나가고 있음을 증빙하는 현상 아니겠는가.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신도 돌아보자. 과연 1년에 몇 권의 책을 읽고 있는지, 아이들에게 책을 권할 수 있는 양심은 있는지를 말이다. 독서를 늘리는 방법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TV를 일단 끄자. 그리고 음주를 줄이자. 현관을 들어서면서 습관적으로 찾는 리모컨은 귀중한 시간을 잠식하고 매일장취(每日長醉)의 음주는 마시는 시간과 숙취의 시간까지 곱절의 삶을 앗아간다. 구조적으로 책과 동행이 어려운 매일 음주자의 지식 자랑은 세계 최강이기에 이길 자가 없지만 시간은 이들을 편들지 않는다. 커피 한 잔에서 느끼는 삶의 카타르시스를 활자와 버무린다면 인생의 진한 향기로 다가와 죽어있던 마음 깊은 곳의 정서를 일깨울 것이다. 가을이다. 오방색으로 물든 단풍잎을 책갈피로 만들어 마법의 공간을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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