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 수필가

살다보면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경우가 있다. 앞으로 닥쳐올 20년은 길지만 과거 60년 전으로 돌아가는 기억의 시간은 극히 짧다. 시간의 허구성이다. 우리가 느끼는 체감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크게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모욕을 겪었거나 친구 혹은 지인의 배신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현 시국을 어지럽게 만드는 일부 정치인들 역시 이러한 인간관계를 벗어나서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정치계의 입문은 거의 연줄이기 때문이다. 독불장군 식 입문은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서 다가오는 총선을 대비한 일부 정치인들의 전략이란 게 결국은 연줄을 다시 형성하는 헤쳐모임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만큼 사람 사이의 연과 줄은 중요하게 작용한다. 살면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대상이 사람이라면 반면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대상도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혹은 행복한지를 판단하는 잣대 역시 주위의 친한 지인에게서 기인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도 어느 정도는 사는 방향이 정해질 것도 같은데 현실과는 약간의 괴리가 있나보다.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인간관계를 잘 정리한 책이 있어서 잠깐 소개해 본다.

제목은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이다. 저자 유영만은 한양대 교수이며 스스로 지식생태학자로 자처한다. 그는 소제목에 관계 에세이라는 말을 넣었다. 적절한 언어 선택이다. 세상은 어차피 관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책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의 가장 첫 장에 귀 막힌 사람을 거론했다. 자기 말만하고 상대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는 사람을 가장 먼저 다룬 것이다. 공감이 간다. 충고나 조언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결심으로 서두를 꺼내자마자 손과 입술까지 떨며 자기변명과 주장으로 대처한다면 바로 귀 막힌 사람이다. 만나야 할 의미가 없다. 다음이 필요할 때만 구하는 사람이다. 일 년 이상 전화 한통 없다가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나열해 보면 나뿐인 사람, 365일 과시형, 말문 막는 사람, 과거로 향하는 꼰대, ()을 읽지 않고 책()잡히는 사람, 대접을 받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등이다. 확 와 닿지 않은가? 외에도 다짐만 하는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 등이다. 가을 맞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 도입해 실행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특히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의 대처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전화기에서 번호를 지우는 것이다. 두 번까지의 약속 어김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으로 담보해 주지만 세 번은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세 번의 약속을 어기면 어김없이 전화번호를 지우고 관계를 정리한다. 그리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과 친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을 가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 말을 내보내기 전에 최소한의 예의가 상대의 입장을 살피는 것이다. 잠깐의 생각을 거친 후에 말을 하라는 의미다. 툭 던져 놓은 말은 이미 수습불가다. 엊그제 연꽃을 나타내는 용()의 한자를 묻는 지인에게 생각 없이 뱉은 말이 물수 변에 얼굴 용이었다. 식물에 초두가 붙는 것은 애들도 아는 상식인데 아무렇게나 던진 답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든다. 이불 속에서야 떠오른 당황스러운 생각은 이미 나를 떠났고 회복할 방법은 없다. ‘수거불부회(水去不復回) 언출난갱수(言出難更收)’라는 말이 있다. 흘러간 물은 돌아오지 못하고 뱉은 말은 다시 거둘 수 없다는 뜻이다. 아는 척을 하려면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복수불수(覆水不收/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를 기억하자. 책은 소개 외에도 내용이 많다. 그리고 상당한 공감을 자아낸다. 어쩌면 내 모습일 수도 있는 저자의 충고는 올 가을 완숙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과거로 향하는 꼰대의 모습에서 귀를 막고 있는 늙은이의 모습까지 겹친다면 너무나 우울하다. 삶에 필수적인 영양제가 인연이라면 이를 충족하는 방법은 상대의 입장에서 살피는 배려가 아닐까. 역지사지라는 말을 많이 쓰는 사람이 오히려 배려심이 적고 솔직히를 자주 쓸수록 솔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전두환 씨가 정의를 부르짖었던 것과 비슷하다. 이른바 행위에 실드(shield)를 치는 것이다. 귀를 열고 상대를 먼저 살피는 배려는 모든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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