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송리 초입 산자락 귀퉁이

오가는 이 귀감이 되라고 세운 비



해방후 극심한 가뭄에 칡뿌리 뿌리로 연명할 때

곳간을 열어 삼백여 생명을 구한 사랑 정신의 비



얼마 전 인터넷 통신 군수님과의 대화방에서 보게 된 정용덕씨의 시 "구휼비"중 일부이다. 실제 영광읍 계송리 영송교회 앞 도로 가에 홀로 선 작은 비를 하나를 만날 수 있다. 구휼비(救恤碑), 말 그대로 식량이나 물품, 돈 등을 베풀어 어렵고 가난한 사람을 구한 선행과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비는 지금까지도 이곳 계송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 비는 1952(壬辰)년에 세워졌고, 6.25전쟁 당시 피폐해진 이 마을의 이장이 되어 몸소 여덟마지기의 논을 희사한 정춘수(1912-1973) 씨가 바로 이 비의 주인공이다.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척박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계송리 사람들의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베푼 그의 선량하고 숭고한 구휼정신은 5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이 비에 깃들어 있다. 반세기의 풍상을 겪어오는 동안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비문을 훑어보면 "흉년이 들어 척박한 마을에 의연금을 내고, 날로 굶주려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덕을 베풀었다"고 적혀 있다(歲値 荒 幸賴義捐 飢饉日苦 飯飽以德)"

지금도 계송리 오서마을을 비롯해 수남·장동, 월곡,송정마을은 2마지기씩을 반답으로 활용하며 적십자회비, 이웃돕기 성금, 마을 공동경비로 지출하는 등 그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정춘수씨는 영광서초등학교 건립 당시 학교부지와 현금을 기부하는 한편, 학교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있어, 학부형과 지역유지, 교직원들에 의해 1956년 3월 그를 기념하는 권학비(勸學紀念碑)가 세워졌다.

구휼비와 권학비에 깃든 정춘수씨의 이웃에 대한 온정과 2세 교육에 바친 열의는 이 마을 사람들의 긍지와 모범이 되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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