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과 고조선(3) 곽일순/영광방송 제작국장

기자조선의 실체

우리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서기전 2333년으로 보고 있다. 서거정. 정효향 등이 왕명에 의해 1484년에 편찬한 [동국통감]에 의하면 단군이 나라를 세운해가 중국의 요 임금이 즉위한지 25년이 되는 무진년戊辰年이라고 적고 있음에서 비롯되어 학교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무심히 읽고 넘어가는 부분이 바로 중국의 요 임금에 관해서이다. 사실 요 임금은 실존 인물이 아닌 전설상의 존재이다. 그래서 중국 역사학계에서도 요 임금이 즉위했다는 해를 공식적으로 인정치 않고 있는 실정이고 국내의 학자들 역시 요 임금의 즉위 연대를 토대로 한 [동국통감]에서 기록하고 있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인정치 않고 있다.

고조선의 건국시기

그러면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언제로 봐야하는가? 사실 어려운 문제이다. 이유는 유물로 연대와 국가의 성립시기를 예상해보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학자들이 건국시기를 서기전 10세기 정도로 보는데,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 이 무렵부터 농업경제와 청동기문화의 유물들이 발견되기 때문인데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비파형동검' 역시 이 시기의 문화인데 이 무렵이 바로 고조선의 건국시기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실 고조선에 관련한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 보니 유물로라도 억지 맞춤을 해보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문제가 있는데, 우리에게 통설로 되어있는 이 학설을 받아들일 경우 중국의 사료인 [사기史記]나 우리의 [삼국유사三國遺事]등에 주나라의 무왕이 즉위 하던 해에 기자를 조선의 왕에 봉했다고 되어있는바 그 시기가 서기전 11세기 무렵이니 앞뒤가 어긋나 맞지 않게 되고 만다. 그러면 둘 중의 하나는 인정할 수가 없는데, 과연 이때까지 아니 오늘날에도 일부에서 믿고 있는 '기자동래설'을 알아보자.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학계

사실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학설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인데 여러 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주장을 폈다. 대충 살펴보면 최남선崔南善의 '개아지조선설', 정인보鄭寅普의 '검조선설', 안재홍安在鴻의 '크지조선설'등의 견해를 피력했지만 구체적인 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또 한편으로 김성호金聖昊박사 같은 이는 고조선을 정복한 것은 기자가 아니고 한韓씨족이었으며 이들은 고조선의 연고권을 차지하려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으며 한씨족의 단군과 아이누어의 온카미(onkami, 숭배)에서 비롯되었을 왕검을 합쳐 "단군왕검"이라 했지만, 분명 신조선이 있음으로 해서 고조선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만큼 기원전 810년 이전은 왕검의 고조선이고 그 후의 조선이 바로 단군의 한씨 조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준準왕의 성이 한韓씨였음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준왕은 기준箕準이 아니고 한준韓準이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기자동래설을 부정하기 위해 여러모로 억지스럽다 싶은 가설들을 들어봤지만 뚜렷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추측의 수준에 머물렀다.

기자동래설의 실체

먼저 중국 전한시대에 편찬되었던 복생의 [상서대전]의 내용을 요약 설명해보면, 기자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를 석방했고 그는 이때 조선으로 망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이 그를 조선의 제후로 봉했다는 것이 바로 기자동래설의 내용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어떤 기록에도 이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진시황의 분서焚書 이전의 중국 고서古書로서 대나무 조각을 엮어 만든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은나라 멸망 후 주나라 무왕 16년에 기자가 주 왕실에 조근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고 그가 조선에 가서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후대에 첨가되었던 내용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고 조작의 가능성을 갖게 한다.

조작 가능성의 이유는 여러 가지 유물들에서 찾을 수가 있다. 실제로 대릉하大凌河 연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1973년 요령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에서 기후아의箕侯亞矣라는 기자의 관명이 새겨진 방정方鼎과 청동예기 6점이 출토되었고 그 외에도 방경 10km 이내에서 많은 청동예기들이 발견되었으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고, 1951년 황현 남부촌에서 출토된 8전의 기기箕器 유물, 1969년에 산둥성 엔타이시烟臺市에서 출토된 기후정箕侯鼎등이 무덤에서 출토된 걸로 봐서 산둥성山東省 지역에서 정착했던 걸로 보인다. 결국 기자동래설은 소중화주의자들의 내면의 표현에 불과했고 기자산둥설이 옳다고 봐야겠다.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서기전 11세기경의 중국에는 고조선이 위치한 동북 지방에 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왕조가 동북지방 관리의 불가함을 인식하고 기자의 뚜렷하지 않은 행적을 끌어들여 이념적 통치를 위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기자동래설이다. 그리고 적어도 중국에서도 현자의 위치에 있던 기자가 조선을 승계하여 다스렸다는 데에 자부심까지 느끼는 우리의 소중화주의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의해 되살아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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