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포둘레길 <6> 흰다리 - 자갈게미

"흰 다리와 붉은 다리"

2011-07-01     영광신문

‘법성진’ ‘진두점막(鎭頭店幕)’의 숙제를 안고 ‘뒷개 저수지’ 아래 직선으로 뻗은 콘크리트로 포장된 농로를 따라가면 ‘흰 다리’가 나온다.

1925년에 가와사끼(川崎)가 운영하던 전남농장에서 ‘자갈개미’와 홍농 칠곡리 ‘메물곶이’로 이어지는 나룻 길에 목냉기 제방(木麥堰)을 쌓아 조성된 간척지에 서해로 빠져나가는 구암천과 장수천 물을 농업용수로 쓰기위해 축조한 콘크리트 둑에 작은 갑문을 여러 개 두어 수동으로 열고, 닫게 하였다. 그래서 둑으로 넘치는 물이 적거나 없을 때는 사람들이 이 둑을 건너다녔는데, 콘크리트로 만든 이 둑이 멀리서 보면 흰색으로 보여 법성포사람들은 이 둑을 ‘흰 다리’라고 불렀다.

예전에 이 ‘흰다리’ 갑문 아래로 여름철이면 멱을 감기 위해 법성포내의 유소년에서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녔고, 둑을 보호하고 토사에 씻김을 방지하기 위해 깔아 놓는 큰 돌 틈으로 민물장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이곳에서 잡은 장어가 이들의 보양식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장마가 져 둑으로 넘치는 물살이 세차서 이곳을 건너다가 휩쓸려서 익사사고가 나기도 했었다.

지금은 갑문구간이 절개되고 통행하기에 아주 불편한 구조로 바뀌었으며, 관계자 이 외는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이 ‘흰 다리’와 ‘목냉기제방’ 사이는 원래 바닷물과 민물이 혼합된 유수지였는데, 지금은 ‘목냉기제방’의 관문에서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고, ‘흰 다리’의 여수토(餘水吐)를 자동처리하고 있어 민물 유수지가 되었다.

‘흰다리’와 ‘목냉기 제방’사이의 유수지 둑을 따라 ‘자갈게미’마을로 가다 보면 목냉기 제방공사가 한창인 ‘수문통’이 보인다.

‘자갈게미’에서 ‘메물곶이’로 이어진 제방의 이 ‘수문통’을 법성포 사람들은 ‘붉은 다리’라 부른다. 예전에는 갑문의 삼각형 양철지붕을 붉은 색 페인트로 색칠하여 ‘흰 다리’와 마찬가지로 멀리서 보면‘ 목냉기제방’의 수문 구간이 마치 붉은 다리같이 보였기 때문에 그리 불린 것이다.

지금부터 86년 전인 1925년에 준공된 ‘목냉기 제방’의 ‘자갈게미’쪽에 설치된 갑문(閘門)구간을 ‘수문통’이라 하였고, 비가 많이 오면 ‘흰다리’와 목냉기 제방 사이의 유수지에 고인 물을 바다로 내 보내고, 반대로 밀물 때는 갑문을 막아 바닷물의 유입을 방지하는 기능을 했다.

'수문통'의 수문은 8개가 설비되어 있었고, 이중구조였으며, 8개의 수문 중 1개만 고장이 나도, 밀물이 들어와 큰 재앙을 당하게 되므로 예비 문을 각각 설비하여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전에 수문고장으로 여러 차례 큰 재앙을 당할 뻔도 했었다고 한다.

특히 1945년 광복 직 후에 철제 수문이 낡아 교체하여야 하는데, 국내 기술로는 제작이 불가능하여 목제수문으로 임시방편 하였다가 일본에서 제작하여 교체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자동으로 설비되어 있다.

'수문통' 옆에 위치한 ‘자갈게미’는 '목냉기 제방'으로 부터 비롯된 마을로 전래되고 있다.

1925년에 '목냉기 제방'이 생기지 전에는 건너편 ‘메물곶이’를 오가는 나룻 터가 있었던 곳인데, 제방공사가 시작되어 현장사무소가 가설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취락이 형성되었고, 공사에 쓰일 돌들은 마을 앞 '대통재' 암반을 발파하여 사용함에 따라 자갈이 많은 구미(灣)라는 의미의 ‘자갈구미’가 ‘자갈게미’로 변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당시의 발파자국이 남아있다.

‘자갈게미’와 ‘메물곶이’ 나룻 길은 1925년부터 육로로 변하여 ‘목냉기제방’길이 생겼고, 이 길은 ‘작은 목냉기’와 ‘큰 목냉기’ 그리고 ‘옹점’마을을 경유하여 1930년대에 개장된 가마미 해수욕장 가는 길이 되었다.

“동아일보로 본 목냉기 제방의 실상”

1917년 6월에 법성포에 터를 잡은 가와사끼(川崎)의 전남농장은 1924년 상순부터 목냉기 제방공사를 시작하게 된다.

이 당시의 참상을 87년 전, 동아일보로 읽어보자 !

『1924년 9월 12일자 동아일보 2면』

“잔인한 천기농장과 백의 노동자의 참경(慘境)”

“전남 영광군 법성포 천기농장에서는 560정보의 간척지개간사업인 320칸의 제언(提言)공사는 지난달 상순부터 시작되어 그 농장에서는 이 공사로써 흉년의 대책을 만드느니 농민을 구제하느니 하여 임의 성언까지 하였으므로 그 근처 가난한 농민들은 물론이요, 다른 지방 농민까지도 수천 명이 모여들어 새벽부터 일표를 얻으려고 애를 쓰나 우선 200명 인부 밖에 쓰지 아니하므로 일표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할 수 없이 산골짝 수풀속이나 바닷가 모래위에 헤매며 다음날만 기다리다가 그 이튿날 새벽에 다행히 일표를 얻으면 모르거니와 불행이도 일표를 얻지 못하게 되면 할 수 없이 산을 넘어 법성포에 가서 한술 밥을 빌어서 얻어먹고, 다시 와서 일표를 구하지 못하여 그제야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련한 사람이 하루에도 수백 명이나 되는데, 겨우 일표를 얻은 사람은 새벽밥을 먹고 까닥하면 생명까지 빼앗기는 위태한 공사장에 나가 짐승에게도 못할 온갖 학대를 다 받아가면서 일을 하나 조수(潮水)를 빙자하는 감독자는 오후 3시에나 낮밥을 먹이며, 이 죽을 노동을 하루 종일하여도 동전 서른 개,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야 60전의 삯전을 받는데, 하루 밥값이 45전, 짚신 10전, 담배 값 5전을 주면 한 푼의 여유가 없게 된다. 일전에도 고창군 대산면 사는 김모(29)는 먹을 것이 없으므로 남부여대하고 이 공사장 바닷가 어느 바위틈에 막을 의지하고 하루에 한 삯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는데,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치어서 다리가 부러져 일도 못하고 굶어 죽게 된 일이 있었으나 이 잔인무도한 농장에서는 돈 일원을 주어서 내어 쫓음으로 어느 친척이 업어간 일도 있었다더라. ...(하략)

이뿐만이 아니었다. 1925년 6월 5일 정오에 안창남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조종사가 된 일본항공수송연구소 소속 장덕창(자유당 시절 공군참모총장 역임)이 조종하는 비행기가 목냉기 상공을 통과한다는 소문이 퍼져 법성포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 이를 구경하려고 목냉기로 몰려들어 대형 참사가 발생했던 현장이 바로 이곳 수문통이다.

정오에 통과한다는 비행기는 정오가 지나고, 점심때가 지나도 오지 않았고, 하늘만 쳐다보던 군중들이 비행기구경을 단념하고 서둘러 귀가하려다가 천기농장에서 수문을 개방하는 바람에 ‘자갈게미’에서 ‘메물곶이’로 건너려던 나룻배가 수문으로 빨려드는 급류에 뒤집혀 30여명이 익사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다시 동아일보로 되돌아 가 보자 !

『1925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 2면』

“도선(渡船)파쇄(破碎) 30명 익사”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 천기농장 축제(築堤) 공사장 수문에서 지난 5일 하오 3시경에 홍농면으로 건너가는 50여명이 탄 나룻배가 부서져 학생 3사람 외 16명이 헤엄쳐서 겨우 생명에는 관계없이 되었으나, 그 외 30여명은 무참히 빠져 죽었다는데, 이에 참살을 당한 사람은 영광읍내 교촌리 사는 최동이라는 사람 외 1명이요, 그 외는 대개 홍농면 학생과부인이라는 바 이 급보를 들은 법성주재소에서는 소방대, 경관 50여명이 출동하여 대 활동을 개시하였으나 사실 발생한 후 30분이 늦게 도착하였으므로 시체 4구만(남 2, 여 2)발견하였을 뿐이라는데, 제일 참혹한 것은 그 중에 아이를 업은 부인이 많다하며 그들은 일본항고연구 주최 장덕창씨의 서해안 연락비행기가 동 5일 정오에 법성포에 도착하므로 그곳에 구경하러 왔으나 정각이 넘어도 오지 않으므로 집에 각각 돌아가는데 그때 마침 천기농장 공사장 수문을 급작히 열어 놓았으므로 급한 물질에 내 질려서 그와 같은 비절, 비참한 비극을 연출한 것이라 하드라.(법성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