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포둘레길 <7> 자갈게미 - 조아머리

2011-07-08     영광신문

“당모탱이와 모래찜 바탕”

‘수문통’에서 도래지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도래지로 진입하는 이 길을 예전에는 ‘모래찜바탕’이라 하였고, 그 위를 ‘당모탱이’이라 하였다.

질펀한 백사장이었던 ‘모래찜 바탕’은 그리 넓지 않은 백사장이었고, 작은 자갈과 모래가 뒤섞여, 8.15광복 이전에는 일조량이 많은 이곳에서 한 여름에 모래찜을 해야만 겨울에 감기에 걸리지 않고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 법성포내 부녀자들은 물론 법성포 주변 마을의 부녀자들까지 많이 몰려들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8.15 광복 후에 가마미해수욕장의 이용이 편리해 지자 이곳의 인기도 시들해 졌다.

지금은 도래지 진입로가 되고, 남도갯길 6000리의 일부 구간인 굴비길이 되었다.

‘당모탱이’에는 무묘(武廟)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당은 관우장군을 모시는 사당으로 공자를 모시는 문묘(文廟)와 대칭하여 무묘(武廟)라고하며, 일명 관왕묘(關王廟)라고 도 한다.

신명희(申明熺)(1901. 6.22-1986.5.23)선생의 육필 유고인 ‘법호견문기(法湖見問記)’에는 이곳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통치(通峙)(대통재) 서편(칠산이 바라다 보이는 정면)에 당(堂)과 당(堂)지기가 거처(居處)하던 가옥이 있었다. 당중(堂中)에 최영 장군, 용왕신, 수신, 관운장, 기타의 화상(畵像)이 당상(堂上)에 걸려도 지고, 벽화로도 되어 조운선의 무고왕반(無故往返)을 수호(守護)하는듯 하였다.』

신명희 선생의 이와 같은 기록과 생전의 증언 그리고 나이 드신 어른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법성향지’를 집필한 고 김영남(金永南)(법성포초등학교 공립 23회)은 “대통재의 후록(後麓), 지금 조아머리와 자갈금의 중간지점이나 되는 곳에 무묘(武廟)가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곳에는 30년 전까지도 당산나무 노목(老木) 한그루가 등거리만 남아 있었다....법성진의 병선이 출진할 때나 조운선이 세곡을 싣고 한강 마포나루를 향하여 출범할 때 배와 인명의 무사안전을 산신과 해신에게 비는 당집이다....”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법성진 서문아래 군바위에서 세곡을 실었던 조운선이나 선소 앞에 정박되어 있던 병선들이 이곳 ‘당모탱이’ 무묘(武廟)에서 제(祭)를 지내고 출진 또는 출항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 이곳은 지난해 4월부터 ‘법성 진내 근린공원공사’를 시행하고 있는데, 내년에 준공예정인 칠산대교로 인한 교통 환경에 대비하여 ‘흰 다리’와 ‘붉은 다리’ 사이의 유수지와 ‘관왕묘’ 등을 테마 화하여 도래지와 연계되는 명소로 가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지하 시인이 뿌리 찾아 해맨 곳“

‘모래찜바탕’을 지나 도래지 경내로 들어섰다.

도래지가 들어선 ‘조아머리’는 400여 년 전에 파평 윤씨가 유배생활을 하던 곳인데, 풍광이 좋고 해산물이 풍부해 그냥 눌러 살았다는 곳이다.

도래지가 들어서기 전에 이 마을사람들은 주로 마을 뒤 능선을 넘어 법성포내와 왕래하였고, ‘조아머리’ 나룻터에서는 썰물 때만 다닐 수 있는 해변 길을 이용하였는데, 언젠가부터 바닷가 벼랑위로 사람하나 겨우 지날 소로가 생겼다. 김지하 시인이 뿌리를 찾아 1984년 초가을에 이곳 조아머리를 찾았을 때 새들이 다니는 길(鳥路)이라고 표현 했을 정도로 아주 좁은 길이었다.

동아일보 『김지하의 회상』“나는 고백한다” 제하의 연재 글에 1984년 초가을의 ‘조아머리’ 모습과 이 길을 묘사한 부분이 있어 다음과 같이 전재하였다.

 

≪전략≫ 곰보 할매 왈 “칠산바다가 한눈에 뵈는 주아실 큰 느티 밑에서 느그 증조부는 몇 년을 눈썹에 손을 얹고 살았니라“ 눈썹에 손을 얹고 살다니!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왠지 섬뜩하기만 했다.

1984년 초가을이었나 보다. 광주에 갔다가 잔뜩 술을 마시고 새벽녘여관에서 눈을 떴을 때 벽 위의 바퀴벌레를 머얼건히 보고 있자니 문득 곰보 할매의 그 말이 내 머릿속에 파아란 불켠 기호처럼 연이어 찍혀졌다.

주아실, 주아머리! 그게 어딜까? 거길 한 번 찾아보자!

전남대 송기숙 교수, 오수성 교수, 작가 황석영씨와 원경스님이 나와 동행했다.

법성포는 거의 패항이었다. 한산한 부두, 우중충한 상가에서 이리 묻고 저리 물어도 주아실은 아는 사람 없고, 칠산바다가 보이는 곳이란 내말로 대충 비슷한 방향만 주워듣고서 바다 쪽, 구법성쪽으로 무작정 더듬어갔다.

사람도 집도 더는 보이지 않는 쓸쓸한 갯가에 문득 깍아 지른 바위가 우뚝 솟아 막아서고 길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막막했다. 근처에 그물 손질하는 어부가 있어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좌우두요“ ”좌우두(左右頭)라? 황석영씨는 빠른 사람이다.

“형님, 바로 여기요!”

좌우두는 주아머리의 한자표기, 왜놈들 장난이란거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가?

우리는 머리가 바다로 돌출한 부분이고 실은 쑥 들어간 부분이니까 이 바위가 바로 주아머리고, 바위 뒤쪽 어딘가 쑥 들어간 곳에 주아실이 있을거라는 걸 유추해 냈다.

그렇다면 길이 있을 것이다. 과연 절벽 옆구리에 실낱같은 조로(鳥路)가 숨어 있었다.

절벽에 아슬아슬 몸을 붙이고 간신히 바위 뒤쪽으로 비잉 돌아 나가보니,

아!

탄성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이며 파란바다, 그 광활하고 황량한 광경이 한눈에 다 들어 왔다. 황석영씨가 중얼거렸다.

“세상 끝에 온 것 같군”

높이 솟은 바위 등성이에서 오른쪽으로 나지막이 쑥 들어간 곳에 모래 발짝 띠가 있고, 그 너머 산어덩에 과연 초가집 대여섯째가 숨어 있는데, 기가 막힌 은산 처였다.

거기가 주아실이었다. 그리고 큰느티가 보였다. 그런데 그때 그 느티아래 집 마당에서 시커먼 무엇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칼이 쭈뼜했다. 모래밭쪽으로 한참 내려가서 다시 느티나무를 쳐다보니 머리 감던 왠 아낙인데 검은 머리를 산발한 채 계속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아하 그렇구나!

증조부가 저 집에서 몇 해를 숨어 살며 주아머리 돌아오는 낯선 사람을 관헌인가 아닌가 살피기 위해 눈썹위에 손을 올리고 늘 바라봤다는 뜻이었구나!

슬픔인지, 노여움인지, 아니면 저 황량한 칠산바다 물결소리에 실려 오는 우주의 탄식인지, 생명의 한(恨)인지, 뭔가 모를 커다란 그늘이 내 가슴에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집안 최고의 우투리 증조부의 슬픈 날들!

그리고 나의 날들!

선천(先天)에 반역하는 모든 삶, 모든 날을 지배하는 그 이상한 죽음의 이미지!

쌔하얀 소외의 이미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유배(流配)의 그 황막한, 황막한 이미지!

나의 세계, 나의 깊고 깊은 번뇌의 뿌리

(19991년 3월 7일자 동아일보에서)

 

소설가 황석영이 ‘세상 끝에 온 것 같았다.’는 ‘조아머리 마을’을 끝으로 4월 답사를 마치고, 김지하 시인이 조로(鳥路)라 표현했던 벼랑 위 산책로를 따라 출발지였던 조아머리 나루 터 주차장에 이르러 자이(自以)와 합류했다.

조아머리 나루에서 시작하여 조아머리 나루로 되돌아 오는 법성포 둘레 길을 싸목싸목 노닥거리며 4시간여, 걸은 셈이다.

나루에 이르러 건너 구수산에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는 하아얀 벚꽃을 보고, 우처(宇妻)가 한마디 했다.

“노년의 흰머리 같다.”고,

자이(自以)가 화답했다.

“4월의 춘설(春雪)”이라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