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九月)의 노래 -50대(代)들을 위한 가을 연가-
강구현/ 칠산문학회원, 영광신문 편집위원
지천명(知天命)의 감수성(感受性), 조금은 어울리지 않을 듯 한 말이다. 하늘의 명(命)을 아는 나이에 감수성이라니...그러나 50대라고 어찌 감성이 없으랴? 깐깐 오월, 미끈 유월, 어정 칠월, 건들 팔월 다 보내고 난 구월은 50대의 감성이 저절로 피어나는 계절이다.
숱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정(靜)적이되 굼뜨지 않고, 동(動)적이되 요란하지 않은 중년의 나이. 아직도 얼마만큼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래도 구월은 온통 그 50대들의 색깔로 가득 차 있다.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들판과 알알이 영글어가는 오곡 백과가 그들의 모습이며, 완행열차만이 잠시 머물다 가는 간이역 철로변에 홀로 핀 코스모스도 그들의 모습이다.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도 그들의 마음이며 진추하의 노래도 그들의 것이고 임예진이 주연했던 “진짜 진짜 잊지마”도 그들의 추억이며 말론브란도나 잉그리드 버그만도 그들의 가슴이다. 가지 끝에 매달린 연록빛 풍만한 곡선을 타고 붉으스름 넉넉한 가을 햇살이 배어가는 사과의 향기,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쉽게 경계를 풀고 막걸리 한 잔 나눌 수 있는 여유, 멀리 있는 그리운 친구에게 아무렇게나 찾아가도 가을 산처럼 포근히 안아주고 궁핍한 삶의 잔해들을 잠시 버려둔 채 흘러가버린 첫사랑의 회상에 함께 젖어볼 수 있는 마음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났어도 몇 마디 주고 받은 정서의 교감을 통해 순식간에 삼 사십 년 세월의 지기가 될 수 있는 그들이다.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생가지 꺾어서 말린 솔잎을 태울 때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신선하면서도 은은한 향기가 난다. 구차스럽지 않고 쫀쫀하지 않으며, 우쭐대지 않고 깐죽거리지 않는 그들만의 향기인 것이다.
순자, 영자, 말자, 명자라는 이름들과 이차, 삼차, 오차라는 이런 이름들이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오십대들아 이 가을에는 살아가는 일이 아무리 바쁘고 힘들더라도 잠시 짬을 내서 우리들만의 향기에 스스로 취해보고 우리들만의 수채화를 다시 한 번 그려보자.
눈부신 아침 햇살을 쪼아대며 열락의 날개짓으로 생명을 찬미하고 노래하던 봄날의 그 새소리에서 출발한 여정을 잠시 멈추고, 이 가을밤엔 애잔하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라도 들어보자. 한 잔 술에 피어난 봄날의 얼굴에도 어느덧 깊어진 수심(愁心)이 역력하기만 한데, 매혹적이었던 장미의 자태도 이제는 하얗게 무리지어 피어난 구절초의 정숙함 앞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구나. 창가의 세레나데는 어디 가고 지금은 가버린 세월의 고요한 회상만 남았는가? 봄날의 강물위에 띄워진 꽃편지가 받는이 없는 가을 호수(湖水)에서 홀로 흐느끼는 밤. 아직 춥지 않은 중년의 밤은 또 왜 이리 스산하고 쓸쓸한 것이냐? 봄 날의 그 새벽이슬 헤치며 “풀물에 배인 치마를 끌고 오던” 여인의 향기는 어쩌자고 가을 남자의 가슴에 남아서 갈대의 몸짓으로 흐느끼게 하는가?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계절의 길목에서, 그대여! 우리 서로 만나거든 가랑잎 서걱이는 목 쉰 소리로 덧없는 세월의 연가(戀歌)라도 한 곡 불러보자. 머지않아 영광의 바닷가 갯바위 틈새에선 우리들의 세월을 닮은 해국(海菊)이 피어나고 추수가 끝나가는 수수밭 양지뜸 언덕에선 어린시절 고향 마을의 전설처럼 들국화도 필터인데 이런 날은 희자매가 부른 우리들의 노래 “실버들”이 어떤가?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유년의 고향꿈을 되새기며 눈물나게 가슴시리도록 파란 하늘 저 멀리로 원유(遠遊)하는 영혼이여! 우리들 가슴에 아픔만 남겨두고 가버린 부모님이 있거든, 남편이 있거든, 아내가 있거든, 젊은 누이나 오래비가 있거든, 친구가 있거든, 또는 어린 자식이 있거든, 사랑했던 사람이 있거든, 그렇게 떠나버린 그 누군가가 있거든... 이 가을엔 서슴치 말고 그 쓸쓸한 무덤에라도 찾아가보자. 가서 한 잔 술로 그 따스했던 숨결들을 다시 한 번 느껴보자. 그리고 사랑하자. 가슴 설레던 꿈과 희망의 언저리에서 때론 견디기 힘든 슬픔과 아픔도 있었지만 아직 살아있기에 더욱 행복할 수 있는 우리가 아니던가? 아침에 눈을 뜨면 멀리 있는 그리운 사람에게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내고, 일상의 언어가 아닌 가슴의 언어로 보내온 답장을 받아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가 아니던가?
여름은 가고 적막한 이거리에/스잔한 바람소리/내맘을 울리네/안개 서린 포도(鋪道)위에/뒹구는 나뭇잎들/발길 따라 그얼굴이/어디로 날려갔나?/ 여름이여, 여름이여!/가버린 젊음이여!/아직 너를 그리며/가을을 앓는다/여름은 갔지만/ 아름다운 전설이 있어/잊을 수, 잊을 수 없는/싱그러운 밤 모습/...이동원의 노래 가버린 계절
사랑하는 오십대들이여! 세상의 중심에 서있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들 삶의 중심에 우리가 서 있거늘 오늘 하루도 저 따뜻한 가을 햇살처럼 맛있고, 멋있고 넉넉하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