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강구현/ 칠산문학회장, 영광신문 편집위원
소년이 아주 어렸을 적이었다. 해방이 된 지 몇 해가 되지 않은 그 해 소년의 나이는 갓 일곱 살, 밥을 먹었어도 돌아서면 다시 배가 고픈 그런 시절이었다. 소년이 살았던 바로 옆집은 읍내에서 몇손가락 안에 든다는 부자집이었고 그 집의 넓은 뜰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정성스럽게 가꾸어진 딸기가 탐스럽게 익었다. 그리고 담 너머로 풍겨오는 그 딸기의 향기는 배고픈 소년과 그 또래들의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낮은 담장 너머로 그 집안을 살핀 후 가만히 담을 넘어서 몰래 따먹는 딸기 맛은 배고픈 식욕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그 날도 소년은 아무도 모르게 그 집의 담을 넘었다. 꿀벌들이 왱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 집안은 고요한 정적에 깃들어있었다.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떨리는 손으로 잘 익은 딸기 몇 개를 따서 들고 막 일어서려는 순간!
딸기밭 옆에 있는 그 집 화장실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그 소리에 놀란 소년의 몸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그 집의 남자 주인과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또 그 순간!
그 집 남자 주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야- 오늘은 하늘이 어쩌면 이렇게 맑고 화창하다냐?” 그러고 무순 말인지 모를 몇마디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렇게 그 집을 빠져나온 소년의 딸기 맛은 그 날도 여전히 꿀보다 달았다. 철없이.
그 해 가을이 되었다. 뜰이 유난히 넓었던 그 집 마당엔 갖 캐낸 땅콩이 멍석 위에 수북히 널렸다. 그 것을 본 소년의 입에선 군침이 돌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이틀 기다림 끝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예의 그 익숙한 실력(?)으로 소년은 또 그 집의 담을 넘었다. 껍질째 적당히 잘 마른 땅콩을 한웅큼 집어들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
이번엔 그 집 여자 주인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소년의 몸은 다시 굳어지고 눈 앞이 흐려지는데 그 집 여자 주인은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태연스럽게 소년이 서 있는 옆을 지나서 부엌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소년의 눈에는 마치 환영처럼 어리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 안주인이 소년의 어머니를 조용히 부르는 것을 소년은 보았다. 마음이 불안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년의 불안은 커가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었는데도 소년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의 근심과 걱정이 커질대로 커진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소년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소년 앞에 나타난 어머니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말이 없으셨다. 오히려 소년이 상상했던 것과는 정 반대로 평온하고 일상적인 표정이었다.
“자네 바느질 솜씨가 워낙 좋으니 옷가지 하나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보자 했네”
그 집 안주인의 요청에 의해 그 날 소년의 어머니는 그 좋은 바느질 솜씨로 옷을 만들어주고 적당한 품삯과 함께 옷을 만들고 난 부동가리를 모아서 챙겨주는 그집 안주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려는 순간!
“어이-잠깐만” 다시 그 집 안주인이 부르더라는 것이다.
“이 것 잘 여물어서 아이들이 먹을만 헐것이네, 얼마 안되지만 자네 아이들 삶아주소”
그렇게 해서 소년의 어머니는 땅콩까지 한바가지 싸들고 집으로 온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소년의 나이도 어느덧 70을 바라보게 되었다.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소년은 일곱살적 그 “순간”의 기억들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기억이 오히려 더욱 또렷하고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어릴적 그 딸기 향을 대신하여 오늘날 그윽한 묵향(墨香)을 통해 자신의 삶과 혼(魂)을 가꾸어가는 소년을 키운 것은 어쩌면 철없던 시절 경험했던 그 “순간”의 영원성(永遠性)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