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을 묻다. 2

-국도 22호선, 광주에서 영광까지 그 철학적 사유-

2012-05-04     영광신문

강구현/ 칠산문학회장, 영광신문 편집위원

봄비가 그친 뒤의 초록은 더욱 짙어져서 멀리 희끄무레하게 보이던 산들도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며 바라보는 눈동자를 향해 평소보다 가까이 다가온다. 벗꽃과 목련, 수선화 등과 더불어 온 산천을 연분홍으로 불태우던 진달래가 지고나니 기다렸다는 듯 처연한 느낌이 들정도로 선홍빛 짙은 철쭉이 피어나기시작한다. 나주의 과원에는 지금쯤 흐드러지게 피어난 배꽃이 달빛 아래 그윽한 색조를 뿜어내고 있으리라.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l야 알랴마난

다정도 병인 냥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이조년-

 

배꽃이 만개한 달밤, 꽃그늘 아래서 잠못드는 시인은 전전반측(輾轉反側) 몸살을 않고 있다. 그렇듯 오월로 접어들며 절정을 향해 가는 봄날의 서정이 충만한 산자락을 따라오는 광주에서 영광까지 국도 22호선, 영광에서 광주로 가는 새벽길이 여명을 맞이하기 위한 길이었다면 광주에서 영광으로 오는 길은 서쪽을 향해 하루를 달려 온 저녁 해를 동무하여 칠산바다 노을 빛으로 물들기 위한 길이다. 길을 따라 멀리 물러서있던 산들이 밀재 터널을 지나는 순간 바짝 양 옆으로 다가온다. 영광 땅에 들어섰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길은 저렇듯 변함없이 이어져 있건만 달밤에 꽃그늘 아래서 잠못드는 시인은 어느 길을 방황하기에 그리도 몸살을 앓았을까?

 

눈물 아롱아롱/ 피리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에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는 끝 호올로 가신 님아.-서정주 귀촉도-

 

촉나라 황제 두우가 위나라에 패하고 끝내 촉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어서 새가 되어 촉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 한맻힌 마음으로 이 산 저 산 날아다니며 울어대는 망제의 혼이 깃든 두견새, 다른 이름으로는 접동새, 귀촉도, 소쩍새, 자규라고도 부른다. 때문에 그 새의 울음은 진달래빛 피의 울음이며 그냥 우는 울음이 아니라 가슴 속의 피를 토해내는 절규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그해 오월의 햇살은 유난히도 눈이 부시고 찬란했었다. 그리고 그 햇살의 눈부심 아래서의 광주는 두견새의 울음보다 더 진하고 선명한 피의 절규가 온 거리마다, 시민들의 가슴 가슴마다에서 쏟아져 나오던 해였다. 그 아픈 상처를 가슴에 안고 뽀얗게 일어나는 흙먼지 뒤집어쓰며 터벅터벅 걸어오던 비포장도로 국도 22호선, 그리고 7년 후, 그 아픈 상처와 절망을 딛고 오랫동안 응어리진 청춘의 끓는 피를 다시 토해내기 위하여 87. 6월항쟁 동안 밤 낮 가리지 않고 수없이 오가던 그 길. 오늘의 그 길에도 어김없이 계절의 봄은 농익어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했던가? 수 많은 민주 영령들이 흘린 그 해 봄날, 피의 역사가 만들어낸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란 나무는 과연 얼마나 튼실하고 알차게 자란 것일까? 지니친 물신주의, 현학적 우월주의, 무책임한 행동과 고성(高聲)의 패거리주의...그리고 그런 일상의 관념 속에서 사라져가는 인간 사랑과 이상향에로의 꿈.

옛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지금도 봄 밤에 잠못들고 고뇌하며 많은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사유의 먼 길을 가고 있다.

 

지금 저기 찬연히 피어오르고 있는/저 꽃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모진 바람과/염열(炎熱)과 혹한의 기후를 견디어/지금 노을빛 꽃잎을 벌리려 하는/저 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서/완이(莞爾)히 숨을 거둔 젊은이들이/마산에서 세종로에서/그리고 효자동 저 전차 막닿는 곳에서//뿌려놓은 값진 피걸음 위에/지금 저기 눈도 부시게 활짝 꽃잎을 연/저 꽃의 이름을 대어주십시오.//-중략-깨끗한 손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이 앞으로 나와주십시오/나 대신 저 꽃송이 위에 살며시 손을 얹어 봐 주십시오.//그 놈들의 그 뜨거운 체온이/그대로 거기 느껴질 것만 같군요.-이한직 깨끗한 손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