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淨化)-카타르시스(Catharsis)
강구현/ 칠산문학회장
영국작가 테니슨이 쓴 서사시 중에 <이녹아덴>이란 작품이 있다.
테니슨이 영국의 고대 설화를 탈화해서 쓴 것으로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책을 덮으면서 누구나 긴 한숨과 함께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된다.
어느 조그마한 해변마을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두 명의 남자아이와 한명의 여자 아이인 헨리와 아덴과 애니, 이들 셋은 동갑내기 소꿉친구로 어려서부터 천진난만한 심성을 바탕으로 어느 누구하나 차별화 시키지 않는 친구로서 우정을 키우며 성장해간다.
그렇게 티끌하나 없는 친구로 성장한 그들도 어느덧 결혼을 해야 할 나이를 먹게 되고 여자인 애니는 똑같은 소꿉친구인 헨리와 아덴 중 한명을 결혼 상대자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애니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한 치도 차이가 나지 않는 두 친구 중 누구를 남편으로 맞이해야 하나....?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애니는 헨리보다 가난하고 바다에서 아버지를 잃은 어부의 아들인 아덴이 자기를 더 필요로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덴을 택하여 결혼을 한다.
아덴만큼 애니를 사랑하는 헨리의 슬픔은 컸지만 그 슬픔을 진정한 우정으로 극복하며 두 친구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준다. 가난하지만 애니와 아덴은 이제 어엿한 부부가 되어서 아이들을 낳고 행복에 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편안히 영위할 만큼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덴은 자신을 선택해준 애니와 그의 자식들에게 지금보다 풍족한 내일을 선물해주기 위하여 원양어선을 타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덴이 탄 그 배는 태풍을 만나 파선 되고 아덴은 실종 사망한 것으로 소식이 전해진다.
그 소식을 접한 애니는 몇 날 몇 일이고 바닷가에 나가 사랑하는 남편 아덴이 돌아오길 기다리지만 무심한 파도만 끝없이 밀려올 뿐 끝내 아덴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애니와 아덴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긴 헨리는 진정으로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 울어주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이제 아덴은 이 지상의 사람이 아니라 판단되어 헨리와 애니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는데 아덴의 자리에 헨리가 들어섰어도 애니와 아덴의 자식들이 느끼는 행복감에는 차이가 없다.
남편과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한 때 불행에 울던 에니와 그 자식들에게 다시 헨리의 사랑으로 인한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아-그러 나 이무순 신의 장난이란 말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덴이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단 하루도 한 시도 잊은 적 없이, 그 절해무인고도에서 오늘까지 버티고 살아남게 만든 그 원동력이 된 사랑하는 아내 애니가 헨리와 재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뛰어들어가 그토록 그리던 아내와 아이들을 끌어안고 만단정회를 나누고 싶지만 자기 자리에 헨리가 있어도 똑같은 행복감에 젖어 사는 애니와 자식들의 모습을 숨어서 바라보며 아덴은 참담한 고통과 슬픔 속에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자기 내면으로부터 답을 얻게 된다.
“지금 여기서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애니와 자식들 그리고 친구인 헨리와 나, 모두가 불행해진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나만 사라져준다면 나머지 모두의 행복은 그대로 영위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아덴은 어느 조용한 도시에 혼자서 숨어살다가 생을 마감 하게 된다.
이 글을 읽고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도대체 사랑이란 그 절대적 가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랑을 위해 나를 비롯한 모두의 불행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것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나의 아픔과 불행을 감수하며 그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인간의 감정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이 글을 읽고 우리가 결론 내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가슴 저 밑바닥 깊은 곳에서 샘솟는 정화감(淨化感)-카타르시스(Catharsis)만을 느낄 뿐이다.
기쁨과 건강한 웃음은 생을 풍요롭게 하지만 깊은 슬픔과 눈물은 영혼을 아름답게 해준다. 현대인들에게 헤픈 웃음은 많아도 아픈 눈물은 흔치 않은 것 같다.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위하여 눈물도 흘릴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