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통령(6) 14대 김영삼
군사정부 종식…최초의 문민정부 탄생시켜
대북정책 냉온탕, 경제정책실기 IMF 초래
한국의 제14대 김영삼(金泳三, 1993년 2월25일-1998년 2월 24일) 대통령! 김영삼은 경남 거제(巨濟) 출생으로 1954년 26세의 최연소자로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5·6·7·8 ·9·10·13·14대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9선의원이라는 전무후무 기록을 세운 한국의 일곱 번째 대통령이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호가 거산(巨山) 김영삼은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現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1371번지 큰달섬(大鷄島)에서 부친 김홍조(金洪祚)와 모친 되는 밀양박씨 박부련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김영삼의 형제 둘은 어려서 요절하여 외아들 신세가 되었다. 김영삼의 가계는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었다. 김문기의 후손들 중 김영삼의 직계 선조가 임진왜란 때 계림에서 거제도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김영삼이 태어날 무렵 그의 부친은 어선을 10여 척 이상 보유하면서 멸치 어장을 꾸려가는 알부자 집안이었다.
애석히도 1960년 9월 25일 거제군 외포리에 침투한 무장간첩에 의해 김영삼의 어머니 박부련이 세상을 달리한다. 무장공비가 쏜 총알 중 복부에 세 발의 총을 쏜 것이다. 아버지 김홍조는 최남순(崔南順)과 재혼하였으나 최남순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김홍조는 1985년 김영삼보다 2년 연상이었던 이수남(李守南, 1925년생)과 연분을 맺는다. 김홍조는 2008년 9월 30일 향년 97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3대 총선 정치입문…유신 독재정권에 맞서
김영삼은 1972년 10월 유신 선포이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의 테러 행위를 강력 규탄한다. 1974년 김영삼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 총재 경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선명 야당론을 주창하며 유신 체제에 강력한 반대와 비판을 역설하였다.
1979년 8월 9일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2명이 서울 마포구 신민당 당사를 찾아 농성에 돌입한 가운데, YH무역 여공 김경숙(당시 21세)이 시위 도중 신민당사 4층에서 추락 사망했다. 1978년부터 김대중을 가택연금 했던 박정희 정권은 YH 사건을 기회로 김영삼마저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979년 9월 8일, 법원은 김영삼에 대한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동년 10월 4일에는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했다. 신민당 총재직에 이어 국회의원직에서 강제로 제명되고 이어 가택 연금되는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0월 16일과 10월 17일 부산에서는 김영삼의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쳤고 10월 18일과 10월 19일에는 경상남도 마산시 및 창원시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김영삼의 제명은 ‘부마(釜馬) 항쟁’을 촉발했고, 유신 정권 종말의 운명적 계기가 되었다.
1987년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신민당을 탈당한 66명의 국회의원이 통일민주당에 입당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를 앞두고 김대중과 후보단일화 협상에 들어갔으나 이견차이와 양자 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최종 결렬되었다.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나서자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1987년 11월에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은 28%의 득표율을 보이며 2위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에게 패배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경상남도 지역에서만 압승을 거뒀을 뿐 수도권 지역에서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패배하면서 제2야당의 당수로 밀려났다. 여기에서 일명 보수대연합 구심점으로서 3당 합당의 대모험을 감행한다.
김영삼은 민정계와 공화계 의원들의 반발을 누르고 제14대 여권의 민주자유당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선다. 1992년 14대 대선 당시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파전으로 격돌하였다.
12월 18일, 14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193만 표차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 후보가 997만 7332표(득표율 42%)로 1위, 김대중 후보가 804만 1284표(득표율 33.8%)로 2위, 정주영 후보가 388만 67표(득표율 16%)로 3위, 박찬종 후보가 151만 6047표(6%)로 4위를 차지하였고, 백기완·김옥선·이병호 후보 순으로 그 뒤를 이었다.
‘5.16과 4.19 재평가’ 저돌적 개혁... IMF로 시든 꽃
김영삼은 1993년 2월 25일,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의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32년 동안 계속된 군사정권시대를 마감하고 문민(文民) 정부를 출범시킨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부패 일신 정책을 과감하며 맹렬하게 펼쳤다.
'신한국창조'를 국정목표로 군부 독재정부 시절의 온갖 잔재와 부조리와 비민주적 악습들을 일거에 척결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우선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하여 1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토록 하였다.
취임 직후부터 김영삼은 민족사관 바로잡기에 심혈을 기울였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서 찾았다. 1993년 8월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환국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8월 5일 국립묘지에 임정요인 묘소를 신설하게 했다.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의 일환으로 대일 종속의 상징이던 중앙청(과거 조선총독부) 철거작업이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던 1995년부터 시작되어 1996년 11월에 완전 마무리 되었다.
김영삼은 군부를 과감하게 개혁하였다. '하나회'라 불리는 군내 사조직과 관련된 정치군인들을 모두 전역시켜 쿠데타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다.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육·해·공군 등 3군 수뇌부를 전부 직업군인으로 교체하였다.
군사정권하에서 왜곡되어온 역사의 재평가도 활발하게 진척시켰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6월 13일 “5·16 군사 정변은 쿠데타”라는 발언에 따라 각 교과서에 군사혁명으로 실린 기술을 쿠데타나 정변으로 고치게 하였다. 4·19는 '의거‘에서 '혁명’으로, 12·12사건은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되었다.
1993년 8월 12일에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를 전격 도입하였다. 1993년 11월 1일에는 금리의 제2단계 자유화 조치를 발표했다. 또 ‘토지거래실명제’(土地去來實名制)를 실시하여 부동산 가격의 안정과, 과도한 토지겸병을 방지하는데 기여하였다.
한편으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93년 12월 정부는 수년 간 끌어오던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을 타결했다. 김영삼은 1995년 1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켜 세계화 시대 원년으로 삼았다. 1996년 12월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김영삼의 대북정책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여파를 북조선지역에 확산시켜 개혁·개방화 체제 유도를 정책목표로 삼았다. 김영삼은 남·북한 간 '공조·공영'이 근간이라고 천명하였지만 실제 대북한 우위를 견지하는 ‘흡수통일'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1996년 9월 18일, 북한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에 침투하여 남북관계는 한층 경색되었다. 1997년 2월, 황장엽 북한노동당 총비서가 남한으로 망명했다. 같은 시기 김정일의 처조카였던 이한영씨가 분당의 자택에서 괴한에게 피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져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되었다.
김영삼 정부의 최대 실책으로 정권말기의 IMF 사태를 들 수 있다. 한국 현대사 최악의 경제대란인 IMF의 심층적 분석은 한보그룹에서 촉발된 대기업들의 연쇄부도와 홍콩, 대만증시의 폭락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더욱이 태국·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외환 위기가 발생했다. 물론 당시 한국은 과다한 외채에 무역적자 행진을 기록하고 있었다.
김영삼은 1997년 12월 5일, IMF(국제통화기금)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을 신청하며 경제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엄격한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김영삼 정부는 미증유의 IMF 대란에다 이에 앞서 1997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었다. 경제의 지속적인 악화와 독단적이고 일관성 없는 정책 등이 맞물려 점차 국민의 지지는 급속도로 시들어졌다.
김영삼은 1994년 마틴루터킹센터가 수여하는 세계적 인권운동 평화상인 비폭력평화상을 받았으며, 著書로는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