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와 교황 프란치스코

이성천/ 자유기고가

2014-08-18     영광신문

'상선약수(上善若水)'! 중국의 명현 노자는 도덕경을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최상의 방법은 물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이는 수천년 후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매우 심오한 삶의 경구로 전해지고 있다. ‘상선’(上善)이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생활의 방법으로 가르키고 있고 그 지혜를 물에서 배우라고 한 것인데 짐짓 물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물은 지극히 유연하다는 점이다. , , 안개, 서리, 이슬, 얼음, 구름 등과 같이 형태를 바꾸며 변화를 꾀하지만 본성은 불변이다. 또한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더라도 그 속에 온전히 담겨진다. 물은 그릇에 맞추어 담겨지는 것이지 조금도 그릇의 상태를 거역하는 법도 없다.

둘째, 물은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스스로를 높이려 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고 벽이 있다면 때를 기다려 흘러넘친다. 억지로 밀어붙이거나, 기다릴 줄 모르고 성급함에 날뛰는 모습과 사뭇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겸허함을 배울 수 있다. 결코 자신을 과시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그럼에도 물은 내면에 엄청난 에너지를 숨기고 있다. 물이 급류를 이루면 아무리 크고 강한 바위라도 밀쳐내 버리고 뚫어버리기까지 한다.

이처럼 물은 유연성과 겸허함, 그리고 막강한 힘 등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겸손온유함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성경에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는 구절이 있다. 온유함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온유하다는 것이 나약함이나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물의 속성처럼 온유함에는 강인함이 스며들어 있지만 그것으로 남을 지배하거나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다. 또한 온유함에는 창의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원칙을 따르는 합리적인 방향성이 깃들어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으면서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가는 긴장의 세태가 되어버린 것은 오로지 휘어질지 모르는 뻣뻣함과 오만, 권위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그는 즉위 이후 줄곧 교황 사저 대신 사제들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생활하면서 마피아와 맞서고 전쟁을 불러온 자본주의, 세계의 무관심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사랑을 전하라는 말씀을 스스로 실천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그의 이번 방한 일정에는 세월호 유가족, 노동자, 위안부 할머니 등 우리 사회에서 소외당한 약자들과의 만남이 예정돼 있다. 늘 낮은 곳으로 향하며 가난한 이웃과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의 의지와 행동은 마치 온유와 겸손을 담고 흐르는 물과 같다.

작은 것에 만족을 느끼며 낮은 곳에서부터 남을 배려하며 이해하는, 곧 겸손과 온유함이 미덕이 되는 풍토가 확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 ‘채움보다는 비움’, ‘직선보다는 곡선’, ‘강함보다는 연약함’, ‘굳셈보다는 부드러움의 가치를 노자는 물을 통해 가르쳤고, 교황의 사랑은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세상의 척박해진 틈새를 촉촉이 적시고 있다.

 

 

이 세상 일은 풀려가는 순서가 있고 순리가 있습니다. 내가 조금 양보한 자리, 내가 조금 배려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낮춰 논 눈높이, 내가 조금 덜 챙긴 그 공간, 이런 여유와 촉촉한 인심이 나보다 더 불우한 이웃은 물론 다른 생명체들의 희망공간이 됩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의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다>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