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향기
강구현/ 칠산문학회장
사람이 살다 간 뒤에는 발자국 같은 흔적이 남는다.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죽음과 함께 지워지기도 하고……. 그 흔적이란 것은 죽은자에 대한 후세들의 추억이거나 존경심 또는 회한이나 원망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후자쪽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만 전자 쪽은 영원히 간직하고픈 인간적 향기에 다름 아니다.
靑丘日月長(청구일월장) 開落一何忙(개락일하망) 千故人歸盡(천고인귀진) 文華尙自香(문화상자향) 푸른 언덕에 해와 달은 길기만 한데 꽃은 피고지고 무엇이 그리 바쁜지? 천고의 임들은 다 가고 없어도 글꽃만은 아직도 향기로워라
고 손종섭 교수가 동문선(東文選)을 읽으며 그 감흥을 읊은 讀東文選有感(독동문선유감)이란 시이다.
“철학이 없는 문학은 맹목이요 문학이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 의학적인 내시(內視:안에서 보이는 것)현상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라. 쓰고 읽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문학인의 사명이다. 2006년은 일연스님 탄생 800주년이다. 소설 삼국유사를 토대로 서사시를 써봐라. 해방 이후에서 6.25까지 사이의 영광은 말 그대로 해방공간이었다. 1945년 해방 당시에는 좌(左)도 없었고 우(右)도 없었다.
9월 15일에 영광 민립 중학교 개교 준비가 완료되었고 10월 15일에 개교하였다. 여중 교장은 초정, 남중 교장은 현암, 양교 교감은 내가 맡았으며 조운 선생은 전혀 관여치 않았다. 초정 선생은 영광 브르조아의 대표 격이었으며 말년까지 문학청년이었다. 46년에 영광 해안선을 답사하는 소풍을 했고 48년에 영광 민립중학교 강당에서 한민당이 결성 되면서 인민위원회와 한민당으로 양분되고 사제간, 친구간에도 분열되었다. 48년 10월 여.순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학교 교사간에도 좌.우 대립이 시작되었고,중학생들도 슬리퍼에다 빨간 리본으로표시 하는 등 편이 갈렸다.
추풍부를 작곡한 조응환은 보성전문 출신으로 기타를 잘 쳤으며 대중가요 가수들과도 친했다. 그는 순수 음악가로서 영광 경찰서에서 여학생을 잡아가자 경찰서로 찾아가 서장 책상을 엎어버렸다. 그러자 차남하 당시 경찰서장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조응환을 학병으로 내보냈고, 해방 후 군수로 있다가 조응환 선생에게 당했다. 후에 결국 조응환 선생 쪽은 또 우익으로 몰려 가족 12명이 몰살 당하기도 했다. 조응환이 작곡한 노래 추풍부는 일제 말기 전남일보 사장 김남중이 고관대작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유명해졌고, 1936년 남승룡 초청 영광 마라톤 대회가 열리자 이 상황을 보고 1939년 9월 9일 영광 체육단 사건이 일경에 의해 조작되었다”.-정종-
“소청은 지금의 목포여고인 항도 여중 초대 교장을 지냈으며 해남출신으로 혜화전문을 졸업한 이동주 시인의 애인이 경영하는 구 목포 법원 옆 남가(南家)라는 음악다방에서 하루종일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듣곤 했다. 이 때 소청은 끼니를 굶을 정도로 궁핍했는데 이동주 시인과의 친밀함 때문에 남가 다방 주인은 소청을 자주 대접하곤 했다.무장 출신 이민우가 운영하는 항도 출판사에서 모든 자료가 만들어졌는데 명예 대표를 소청이 맡고 있었으며 극작가 차범석의 동생인 차재석은 소청의 전속 비서로서 24시간 동행 하면서 소청을 뒷바침 했고 소청의 지시를 받아 목포의 문인들을 총규합해냈다.
안성현을 항도여고에 음악선생으로 데려와 부용산가를 작곡하게 하기도 했다.일제 말기 서울 명동의 사보이 호텔 아래 돌체라는 유명한 음악다방이 있었는데 그 주인은 영광 홍농 출신이며 광주고보 1회 졸업생인 하석암이었고 여자주인은 전 도의원 정헌승의 누님이었다. 당시 돌체가 보유한 클래식 LP판이 5.000여장이었으며 3면이 음반으로 가득 차있었다. 음악을 주문하면 DJ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음반을 찾았다.
남여 대학생 음악인 문학인 등 예술인 모두가 애용하는 명소였다.-중략-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이 모든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봉암을 초대 농림장관에 임명했고 조봉암이 곧바로 농지 개혁을 착수 하자 친일파 등 대 지주들이 반발하면서 좌익몰이 사냥이 시작되었고 조운 선생도 조봉암과 함께 한민당을 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서 좌익으로 몰려 관제 공산주의(사회주의)자로 내몰리게 되었고 결국은 월북까지 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서 단
위의 이야기를 해주신 두 분은 일제 후반부터 현재까지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오신 분들이다, 정종 박사님은 1915년생으로 금년 101세이시며 철학을 전공했고 고 서단 님은 87세이시며 법학을 전공하셨다. 두 분의 공통점은 지극히도 영광을 사랑했으며 인문학의 가치를 중시 했고, 군사에 정리되지 않은 영광의 소중한 가치들을 가감 없이 후학들에게 전해주시기 위해 열변을 토하곤 하셨다는 점이다.
정종 님은 이제 요양병원에 계시고 서단 님은 얼마 전 작고 하셨다. 전국 최초의 영광 유치원 이야기를 비롯해 두 분 께서 해주신 영광의 자랑스런 이야기들과 그 가치들은 이제 우리들이 이어가야 할 우리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님들은 가고 없어 다시 들을 수 없는 두 분들의 말씀과, 다시 느낄 수 없는 인간적 향기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그리워진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은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가? 그 것은 기적 같이 와서 한 순간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곧 사라진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은 모두 슬픔을 남기고, 행복한 것은 모두 아쉬움을 남긴다.-김진섭 수필 백설부 중에서
아-누가 있어 우리 후학들에게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또 들려줄 것인가?
빛나는 꿈의 계절의 쓸쓸함이여!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의 처연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