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

강구현/ 칠산문학회장

2015-09-14     영광신문

초가을 아침의 고운 햇살 흠뻑 머금은 칠산바다의 잔잔한 은파를 타고 넘어 나는 간다 .미지의 세계로!”

가지 마셔요. 어쩌면 영영 못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간밤엔 비바람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며 미친듯이 앙탈을 부리던 바다가 아침이 되면서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잔물결 한 점 없는 수면 위로 한 없이 걸어가고픈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숨죽인 바다는 아직 뜨거워지지 않은 아침햇살에 반사되면서 마치 청람 빛 융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곱기만 하다. 그래서 다시 육지를 향해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물고운 칠산바다를 건너서 그리운 미지의 세계를 찾았어. 아담과 이브가 원죄(原罪)를 짓기 이전의 에덴동산 같은 유토피아(Utopia), 실락원(實樂園). 이상촌(理想村), 이상향(理想鄕), 여기가 바로 불국정토(佛國淨土)인가? 무릉도원(武陵桃源)인가? 나는 지금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속의 몽롱함에 젖어있어.”

현재 내가 타고 있는 배의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각시섬은 초가을 나른한 햇살에 졸음이 겨운 듯 적막하기만 하고 저만큼 떨어진 낙월도와 송이도 그리고 그 뒤로 아스라이 희미한 안마도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처럼 물 위에서 가물거린다. 남쪽으로 신안군 어의리와 전장포(임자도)가 길게 늘어서 있고, 서쪽으론 재원도와 우리의 서남해안 마지막 섬 허사도가 국경의 파수꾼처럼 가물가물 수평선 위에서 외롭다.

지금 내가 찾은 유토피아는 자연스러운 현실세계와 환상적인 도원(桃園)의 세계가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시각적 현실세계와 감성적 상상 세계의 공존이라니!

영국 작가 토마스 모어(Tomas more) 경의 작품에 의해 최초로 발현된 인간의 이상주의인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는 곳(outopia)를 뜻하지만, 동시에 좋은 곳(eutopia)를 뜻하기도 한다. 이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게 되면 유토피아는 한마디로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그것은 신화나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환상의 세계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정신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곳이라는 점에 비중을 둘 경우 유토피아는 역사의 시작과 함께 인간이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찾아 헤매온 이상향, 또는 직접 실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온 이상사회(국가)를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 ‘여기에 없다는 것이지 그것이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블로흐(Ernst Bloch)의 표현을 빌리면 유토피아는 아직 없는 것, 즉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완성의 현실태(現實態)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은 현실 도피의 관념적 유희일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진지하게 사색하고 계획하는 사고의 실험이며 나아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회이론을 구성하는 작업이다. 이 점에서 오늘날의 유토피아는 허황된 꿈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며, 미래에 대한 종합적 비전과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종의 사회공학이 되었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대한 불만의 산물이다. 동시에 현실의 구속 조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해방 정신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변화와 개혁을 촉구하고 새로운 가치와 목표를 추구한다. 이러한 면에서 만하임(Karl Mannheim)은 유토피아가 비록 현실 초월의 의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달리 현실을 개혁하려는 힘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유토피아 사상이 역사적 주요 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개혁 운동과 혁명 운동이 유토피아의 특정한 청사진에 따라 진행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초기 크리스트교인들은 예수의 재림과 세계의 종말을 확신하고 이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상황은 아직까지 도래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크리스트교의 많은 개혁은 이 묵시록적인 신화에 힘입어 가능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결과도 초기 혁명가들의 꿈과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상과 비전이 없이도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두 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은 초기 혁명가들의 꿈과 희망을 완전히 실현시켜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혁명이 이루지 못한 것을 달성하려는 유토피아 정신은 역설적으로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남는다고 하겠다. 블로흐가 갈파했듯이 유토피아의 생명과 원천은 바로 이 같은 불만과 결핍을 채우려는 인간의 욕구와 충동에서 유래한다.

유토피아는 개혁의 원리일 뿐 아니라 진보의 원리이다.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다른 시대의 유토피아인들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속에서 발가벗은 상태로 비참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유토피아는 모든 진보의 원리이며 더 좋은 미래를 위한 시도라고 강조하였다. 프랑스의 주장처럼 유토피아는 진보에 대한 신앙이다. 진보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이성의 신뢰란 인간은 이성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고 사회를 뜻하는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믿음이 인류를 원시 상태에서 문명 사회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다.

그런데 내 눈 앞에는, 영광의 칠산바다에는 세상에 없는 유토피아가 꿈처럼 펼쳐져 있다.

자 많이 쉬었으니 다시 또 투망(投網) 준비를 해 보자한 참 동안 유토피아적 몽롱함 속에 취해 있는 나에게 선주(船主)인 친구 삼중이의 목소리가 몽환의 나를 깨운다. 투망을 하기 위해 그물에 걸린 이물질을 제거하고 다시 가지런히 정리하는 작업을 끝없이 되풀이 하다 보니 어깨가 아프고 허리가 휠 지경이다. 그보다도 5톤짜리 배의 좁은 공간에서 10여일 가까이 단순 노동에 시달리며 생활하다 보니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 지금 난 참 행복하다.”

?”

여러가지로 생활하기 불편한 이 좁은 공간에서 몇 날 몇일을 지내며 육체적으로 피곤한데도 서로 짜증 내지 않고 웃으면서 즐겁게 일을 하고 있으니 이만한 행복이 어디 있겠냐?, 우리가 더 나이가 들면 서로 이해 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그렇게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모여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래 유토피아가 따로 있겠냐? 그렇게 사는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곳이 이상촌이지...”

그래 맞아, 행복이나 파라다이스는 어디에도 없어, 다만 우리 마음 속에 언제나 살아 있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걸거야.”

민어가 좀 덜 잡히면 어떠냐? 호구(糊口)에 지장이 없을 정도면 충분하지.”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 어느덧 어망 정리가 끝나고 나니 낙월도 앞 골 민어들의 합창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는 듯 하다.

그렇게 나는 영영 못 돌아올지도 모를 미지의 세계를 찾았고 아름다운 나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그대 이제 그만 안심 하시게 이렇듯 그대의 걱정과 기다림 속으로 내가 돌아오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