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殘像)
강구현/ 칠산문학회장
-광복 70년 그 세월의 흔적들-
부귀 영화와 권력을 향한 욕망, 그리고 명예를 위해 끝없이 되풀이되어 온 투쟁의 인간사, 변덕스럽기만 한 세정(世情) 속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질병과 재난, 예측할 수 없는 사고.... 그 수 많은 고개를 넘고 또 넘어 용케도 지금까지 버티어 온 삶, 그 끝에 찾아드는 건 인생의 덧없음이러니...
올해로 광복 70년, 우리나라 나이로 칠십일세 되신 분들이 해방둥이로 태어나신 분들이고, 그 윗세대인 80대 90대 되신 분들은 일제 감정기로부터 우리의 근 현대사에 있었던 온갖 질곡과 고난의 언덕길을 맨 몸으로 넘어오신 분들이다.
일제의 폭앞과 착취 속에서 단말마적 한숨을 몰아쉬며 징병이나 징용으로, 어쩌면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머나먼 곳으로 떠나야 하는 자식들과 부모님들의 피맻힌 생이별을 하던 곳이 어디 “비내리는 고모령” 뿐이었으랴? 전국 방방곡곡의 고개란 고개는 모두가 다 한 맻힌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울면서 넘어야만 하는 “박달재”였으며 가슴에 피울음 돋게 하는 “아리랑”고개였으리라. 해방 후로도 또 하나의 팍팍한 고갯길을 넘어야 했으니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나라의 살림 속에서 초근목피로 넘어야 하는 깡마른 보리고개는 또 얼마나 넘기 힘든 고개였으며 다리쉬엄조차 할 여유를 주지 않는 배고픈 고개였을까? 그 와중에 터진 동족 전쟁은 또 얼마나 많은 박달재와 고모령을, 아리랑 고개를 생산해냈으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 동족간 증오의 고개를 만들어냈을까? 그런 핍진한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흘러서 오늘의 우리와 우리 나라가 있게 한 주인공들은 이제 이 풍진 세상의 뒤안길에 조용히 머물고 계신다.
그 분들이 지금까지 생존해 주신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할 뿐이건만 내 어린 마음 속엔 아직도 그 세대들에 대한 후회스런 잔상이 남아 마음을 저리게 한다.그 때 왜 그랬을까? 그리고 지금도 가끔은 그 때에 대한 후회와 뉘우침의 마음을 잊어버린 채 그 때의 과오를 되풀이 하며 마음 하나 가다듬지 못하고 있을까?
몸이 불편해서 행동이 굼뜬 부모님께 빨리 서두르라고 짜증내는 자식들, 버스에 민첩하게 올라타지 못하는 노인에게, 횡단보도에서 갈팡질팡 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집에 가만히있지 저 불편한 몸으로 어딜 돌아다닐까?”...하고 생각하는 등등의 마음들 어머님이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조차 생퉁맞는 소리 무질러버릴 때 문득 어머님 얼굴에 나타난 그 쓸쓸한 표정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있음에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을 했으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되풀이하고 있으니....
아무리 어렵고 각박한 처지였을지라도 그 분들이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어내며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하고 이 나라가 있게 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은 바로 우리들인 당신들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었을텐데...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다시 못올 어머 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사후에 만반진수는 살아생전의 일배주만도 못하느니라” 사철가(백발가)의 한 대목이다.
기로연(耆老宴),
매년 상사(上巳 : 음력 3월상순의 巳日, 혹은 3월 3일)와 중양(重陽 : 9월 9일)에 보제루(普濟樓)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 기로연에는 정2품의 실직(實職)을 지낸 70세 이상의 문과출신 관원만 참여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종친(宗親)으로 70세에 2품 이상인 자, 정1품관, 경연당상관들을 위하여는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영회(耆英會)라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들 잔치에는 왕이 술과 1등급 풍악을 내렸다. 조선시대의 기로연은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후 태조 자신이 60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학문과 덕행이 높은 늙은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것이 처음이었다.
태조는 또 잔치비용 마련을 위하여 토지·노비·염분(鹽盆) 등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 잔치는 예조판서가 주관하여 준비하였고, 왕명을 받은 승지가 특별히 파견되어 감독하였다. 잔치에 참가한 문신들은 먼저 편을 갈라 투호(投壺)놀이를 한 뒤, 진 편에서 술잔을 들어 이긴 편에 주면 이긴 편에서는 읍하고 서서 술을 마시는데, 이 때 풍악을 울려 술을 권하였다.
이러한 의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잔치를 열어 크게 풍악을 울리고 잔을 권하여 모두 취한 뒤에 파하였고, 날이 저물어야 서로 부축하고 나왔다. 태조·숙종·영조와 고종과 같이 나이 많은 왕들은 직접 이 잔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우리 영광에서도 해마다 향교가 주관하여 기로연 행사를 한다. 금년에도 음력 9월 8일(양력 10월 20일) 영광 예술의 전당에서 기로연 행사가 예정되어있다. 그냥 연례적이거나 형식적인 행사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서 그 의미와 가치를 한층 높일 수 있도록 젊은이들과 청소년들까지도 참여시켜 효에 대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 지역 경제 발전이나 홍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행사마다 몇 천만원에서 수 억원씩 군민의 혈세를 낭비해가며 잘 나가는 연예인들이나 이벤트사 뱃속만 채워주는 그 알량한 축제보다 훨씬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효(孝)는 만행 만덕의 근간이니까.
모든 어르신들의 가슴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잔상(殘傷) 위로 삶에 대한 진정한 행복과 보람이 느껴져 그 팍팍한 고갯길을 넘던 노정의 고단함과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후세들에게 까지도 그 가치가 전해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