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사람 이야기 -우리나라 음악다방의 효시 ‘돌체’
강구현/ 칠산문학회장
1970년대 통키타 가수들의 주요 활동무대이며 신인가수의 등용문이 되었던 공간으로서 명동의 "세시봉"이 있었다면, 그보다 훨씬 이전, 서울에 있었던 음악 공간으로서는 명동의 "돌체"라는 음악다방이 있었다.
당시 사보이호텔 아래층에 있었던 그 다방의 남자 주인은 우리 영광의 홍농 출신으로 광주고보 1회 졸업생인 하석암이었고, 여자주인은 전 도의원 정헌승의 누님 정두형으로 현재 영광읍 농협 동부지소 옆 복개천 주변이 그의 집이었다.
하석암은 광주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을 갔는데 클래식 음악에 심취한 나머지 고향집에서 보내주는 학자금 대부분을 클래식 음반을 사 모으는데 투자했고 그렇게 수집한 음반들을 귀국할 때 고스란히 가져와서 그 음악다방을 차렸다.
돌체 다방은 남ㆍ여 대학생들을 비롯해 문학인, 음악가는 물론 모든 예술인들과 정치인 등 저명 인사들까지 애용하는 유명한 곳으로, 클래식 LP판을 무려 5000여 장이나 보유하고 있었으며 3면이 모두 음반으로 가득 차있었다.
김기림. 김수영, 박인환, 서정주, 오상순, 이어령, 전혜린, 전숙희, 정한숙, 정현웅, 조병화, 조지훈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과, 송지영, 조덕송, 이병구등 언론인, 김환기, 변종화,이중섭등 화가, 노경희, 최무룡 등 영화배우, 영화감독 정영일, 나운영 영화 평론가 무용가 피아니스트 등 우리나라 예술분야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 돌체다방의 단골로서 시대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그 곳에서 예술혼을 길러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아버지는 아들이 피아노에 소질이 있어 그 아들을 음악가로 성장시키기 위해 매일 아들의 손을 잡고 돌체에 와서 클래식을 들려주곤 했는데 그 때의 그 아이가 영화배우 윤정희의 남편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다.
손님들이 음악을 주문하면 DJ의 조수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주문된 곡이 수록된 음반을 찾아서 디제이에게 전달할 정도의 규모였으며, 1940년대부터 1950년대 서울의 지식인들이라면 돌체다방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유명했다.
그렇게 유명해진 돌체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1.4후퇴 때 주인인 하석암이 피난을 가면서도 소달구지에 음반 3.000여장을 싣고 부산으로 내려가 광복동에서 음악다방을 차려 운영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다.
우리나라 음악다방의 효시로서 돌체는 단순히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공간으로써만의 기능을 넘어 종합예술 무대로서, 각 분야의 역량 있는 예술인과 큰 인물을 길러내는 상아탑의 기능까지도 담보해냈던 것이다.
문학인들이 모여 엘리엇의 작품을 논하는가 하면 철학도들은 또 같은 패거리들끼리 스피노자나 쇼펜하우어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법학도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시대의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으며, 또 한 구석에선 고뇌에 찬 삶의 단면과 열정의 스케치를 머릿속에 구상하며 눈을 감은 채 담배를 피워물고 있을 초보 화가의 모습도 보였었다.
지금 이야기만 들어도 돌체의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지금까지의 돌체다방에 대한 이야기는 몇 년 전에 작고하신 고 서단 님이 필자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며 일부는 필자가 자료를 찾아 기록해두었던 내용들이다.
돌체와 그 주인의 전설 같은 이 이야기는 어느 한 개인의 인생사이기 이전에 우리나라 근현대 예술과 문화사의 중요한 한 대목이기도 하며 우리 영광의 자그마한 역사로서도 가치가 충분하다.
이렇듯 타지역에 비해 개화사상에 눈을 빨리 뜨고 신 문물을 받아들여 전통과 접목시킬줄 알았던 우리 선대들의 업적은 개인의 열정과 역량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영광이라는 자연환경과 생활 여건이 길러낸 생태적 영향도 적지 않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의 우리는 영광인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영광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