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끝이 아니다 -우주적 세계관 속의 나는 절대자다-
강구현 시인·영광신문 편집위원
우주는 끝이 없다.
그래서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실은 그 끝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기에. 시작(처음)도 없는 것이다.
우주가 왜 끝이 없는가? 처음(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주의 끝이라고 가정하고 그 끝을 생각할 때 그 끝 너머에는 또 무엇이 있고 또 그 무엇 무엇의 너머너머 또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끝없는 그 무엇만이 있을 뿐이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수(數)라는 것도 실은 처음과 끝이 없는 것이다. 다만 계산을 위한 하나의 개념일 뿐. 영(0)이란 숫자에서 1(일)이란 숫자까지는 유한인가? 무한인가? 자연수의 개념으로만 보면 유한인데 소수점 이하의 단계로 가면 끝이 없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물(마주 앉은 사람의 얼굴이거나 길가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이거나 그 무엇이거나...)이 과연 내 눈에 보여진 그대로의 모습일까? 아니다. 지금 내 눈에 비친 모습들은 그야말로 찰나(刹那)보다 짧은 순간 이전의 모습일 뿐 빛에 반사되어 내 눈에 투영되기까지의 시퀀스(Sequence)는 아니다.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는 밤하늘의 보름달도 안드로메다 성운도 사실 지금의 모습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안드로메다 성운은 이미 수백만년 전에 출발해서 우리 눈에 보여지는 수 백만년 전의 모습이다. 어쩌면 그 성운은 다른 형태로 변했을지? 아니면 아예 없어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의 안드로메다를 확인하기 위해선 우리가 수 백만년을 더 살아야 가능하다.
종교적 절대자가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면 그 절대자는 어디서 왔으며 그 존재 형태는 어떤 것이었고 그 이전의 시공간은 어떤 것이었을까?
해답을 찾을 수 없기에 인간은 믿고 의지할 대상으로써의 종교를 만들었다.
우주적 세계관에서 보면 시간이나 속도라는 것도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이란 도대체 무얼까?
속도는 무엇이며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시간과 속도의 관계가 과연 절대적인 것일까,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간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서로의 약속을 통해 만들어놓은 규칙일 뿐 본질이 없는 것이다.
굳이 속도를 따진다면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돛단배를 순간적으로 달려가서 볼 수 있는 우리의 시각은 속도일까? 시간일까?
태양계 너머 은하계 너머, 그 너머 너머 무극 무한을 상상하는 우리들 생각의 속도는 과연 측정이 가능할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도, 시간과 공간이 결합되어 있다는 근거만을 발견할 수 있었을 뿐, 시간의 본질은 알아내지 못하였다. 뉴턴이 제창했던 시간의 절대성도, 아인슈타인이 발견했던 시간의 상대성도, 칸트가 말한 이미 우리가 갖추고 있는 시간이라는 개념인 선험성도 결국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의미부여, 또는 가질 수 있는 성질, 해석에 관련한 것일 뿐 애초에 '시간'이라는 단어 자체도 우리가 느끼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기로 정한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시간의 정의를 <시각과 시각의 사이>라고 정의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시간, 시공간, 윤회, 사건의 연속, 시각 등이 가리키는 '어떤 것'에 대해 본질적 정의를 하기가 어렵다. 단지 각자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EDS 시간의 정의 중에서*
이쯤 되면 우리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삶, 영혼, 생명, 생각...등
시간, 공간, 속도 등 우주의 그 무한성 속에 살아 숨쉬는 나의 본질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0년 전 빛에 반사되어 우주의 공간 속으로 날아간 나의 모습은 지금쯤 어느 별나라에 가 있을까?
무한의 우주 공간 속에서 인간이라는 하나의 물질로 존재하는 나는 극히 미세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참으로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주에 관한 상상을 하면서 그 시공간을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가?
중요한 것은 본질이 없는 시공간 속에서 그 본질 없음에 끝없는 질문을 하는 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우주의 끝없음도 천지창조(?) 이전의 그 무엇도, 속도와 시간도 의미 부여가 가능해지는 것이기에 우주적 세계관 속의 나는 곧 삶의 주체로서 절대자인 것이다.
때문에 우주적 세계관 속의 나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우주의 끝없음만큼 광대한 존재이며 우주만큼 대범한 존재인 것이다.
우주적 세계관 속에서는 소인배가 있을 수 없다.
만화영화 ‘토이스토리’에서 ‘버즈’가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한 번 크게 외쳐보자.
“가자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