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계절을 찾아서 [봄에 쓰는 가을 편지]
강구현 시인
설아(雪娥)
수 많은 봄과 여름 그리고 겨울을 보내면서도
아직 한 번도 맞이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가을은 어디 있을까?
"진달래 불길로 타는 산천에 나는 바람이 되어" 흐르던 날들, "초록이 뚝 뚝 눈물지는 계절에 취해 부르던" 노래, 기나긴 사연의 "겨울밤에 쓰던" 편지, 그 많은 시간들중에 우리들의 가을은 어디쯤 머물고 있었을까?
설아(雪娥)
비정(秘庭)의 어둠을 찍어대던 두견새의 진달래빛 절규도, 에덴동산의 하늘 위로 올려다보던 안드로메다의 성운(星雲)도, 광주공원 시계탑의 초침을 돌려주던 초록의 빗방울도, 두우리 바닷가에서 하늘로 솟구치던 거센 눈보라도, 되병 소주를 비우게 했던 불의 무덤도, 겨울밤 "황금마차"에서의 따스했던 온기마져도....
설아(雪娥)
이젠 모두 다 기억 속에서 지워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그 텅빈 여백 위로 요란스럽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을 우리들의 가을이 갈밭의 서걱임처럼 그렇게 한 곡의 오선지로 그려질 수 있도록 지워야 할 때가 되었구나.
"갈밭의 저 바람은 그 님의 숨결인가?
나 홀로 창가에 서서 옛노래 불러보네.
그리움에 울지말자. 기다림에 지치지 말자
순결하고 아름답게 꽃처럼 예쁘게
내 사랑 고운임이 오실 때까지"
설아(雪娥)
국악인 남궁소소의 그 노래처럼 우리들의 가을도 그렇게 노래로 채워질 수 있도록, 코로나 19에 빗대어 포기하지 말자. 세월을 탓하지 말자. 나이에 주눅 들지 말자. 세상에 지치지 말자. 지나친 이상주의에 얽메이지 말고, 지나친 현실주의(자본의 속성)에 굴복하지도 말자.
우리들의 계절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아직 청춘이다.
술잔 속의 노래가 출렁이는 한 우리는 아직 불타는 청춘이다.
설아(雪娥)
우리가 끓는 가슴으로 추구했던 이상(理想)은 언제나 다다를 수 없는 저 언덕 너머 피안(彼岸)의 세계였지만 그래도 그 열정 때문에 우리는
치열할 수 있었고, 그 순수했던 열정이 우리로 하여금 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었더냐?
그러고도 또 다른 모순들이 난무하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직 남아있는 우리의 청춘을 포기 하지는 말자.
설아(彼岸)
우리의 진정한 이상은 모순이 있어서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고 더욱 빛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그 것을 피하려 하지 말자, 절망도 하지 말자.
세상이 우리를 버린다 해도 우리 스스로가 버림받지 말자.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그 통속함 속에서 또 다시 우리의 청춘을 불태워보자.
설아(雪娥)
비에 젖은 낙엽을 쓸어모아 불을 지피면, 마른 낙엽처럼 쉽게 타버리지 않고 그 촉촉함 속에서 가느다란 연기를 길게 뿜어올리는 불씨의 은근함이 우리들의 달라진 청춘이란다.
연분홍 꽃잎의 봄날도, 짙푸른 초록의 싱그러움도 모두 함께 모아서 이제 또 다른 생명을 꿈꾸는 계절의 작은 불씨 하나가 되는 것, 그 것이 우리의 새로운 청춘이란다.
설아(雪娥)
보름달은 반드시 기울게 되고, 뜨거운 태양도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모든 것이 흥(興)하면 쇠(衰)한다
는 만고의 진리 앞에 우리는 겸손이란걸 배웠고, 그 겸손을 통해 자신을 돌이켜볼줄 아는 지혜를 익혔다.
또한 떨어지는 낙엽에도 희망은 있고, 어둠이 깊을 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신념도 꺾지 않았다.
그렇듯 이제 우리의 청춘은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닌 현실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실용주의적 이상주의로 무르익어가는 또 다른 색으로 채색되어지고 있구나,
설아(雪娥)
지난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새움을 틔원낸 온갖 초목들에 꽃은 피었다 지고 그 꽃잎 지고 나서 열매가 영글어가고 짙어지는 초록의 그늘 아래 새들이 노래하고... 그렇게 우리의 가을이 준비되어가고 있구나.
설아(雪娥)
뜬금없는 코로나ㅡ19는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지만, 방역수칙이라는 미봉책에만 매달려서 모든이들의 인내와 희생만을 강요하는 정책의 부재가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이 계절에도 우리들 희망괴 청춘으로 채워질 가을이 저만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구나,
설아(雪娥)
우리의 그 가을을 향해 힘차게 가보자. 손잡고 가보자.
술잔 속의 노래가 출렁이는 한 우리는 아직 청춘이다.
불타는 청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