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단일기

강구현 시인

2022-01-17     영광신문
강구현 시인

세월은 흘러서 나이가 들고, 나이가 들수록 청춘시절에 대한 기억만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그 선명함 속엔 반드시 아쉬움과 그리움이 동반되고ㅡ또 한 해를 시작하면서 삶의 새로운 시무식을 하듯 지난 날에 대한 회상과 새로운 다짐을 한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짧을지도 모르는 나이에 또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신년 벽두부터 떠오르는수 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무겁다.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참 삶의 가치는 무엇이고 인간 본질은 무엇인가?

그런 궁금증으로부터 엉뚱한(?) 상상을 한다.

만약에 나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주어진다면, 돈 명예 권력 등 그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더 나아가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남아서 온 천하의 주인이 된다면 나의 존재의미와 가치는 어떻게 규정할 수가 있을까?.

이는 단순히 필자만의 고민은 아니다.

유사 이래 수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인간에게 주어진 사고(思考)의 능력을 발휘해 수 천년 동안 인간의 본질과 삶의 진리를 연구하고 설파해 왔지만 그 모든 이론들 중 그 어떤 것도 인간 본질에 대한 한 조각 퍼즐에 불과할 뿐 완벽한 규명이 되지 못한 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인간의 삶이나 가치에는 어쩌면 본질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없는 혼자인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세상이 나 혼자인데 돈을 벌어야 할 이유도 없고, 누구와 경쟁 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명예나 지위 또는 근원적 욕망에 사로잡혀 열심히 살아갈 필요도 없고 어떤 진리나 가치를 추구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 가치 추구로부터 탐구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찰라적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저쪽과 이쪽의 차이는 또 무엇인가?

가시적으로든 또는 관념적으로든 숨이 끊어지기 한 순간의 저쪽은 생()이었고 이쪽은 사()이다.

그렇다면 그 생사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당연히 죽고 나면 죽기 전에 했던 것들을 할 수 없게 된다.

육신은 숨을 쉬지않게 되고 먹을 수 없게 되고 피가 돌지 않게 되고 신진대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육신이 부패되기 시작하고 말도 할 수 없게 되고...그런 현상들이 생사 차이의 전부일까? 아니다. 단순히 숨 쉬지 않는다고, 육신이 활동하지 않는다고 생사의 구분을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현상의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다.

그게 무얼까?

우리는 그 것을 영혼이라 말한다. 그렇게 영혼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생겨나고 래세를 기약하고, 제사를 지내고 풍수지리에 얽매이고 극락왕생이나 천국으로의 인도를 기도를 한다.

그러나 그 영혼도 래세도 극락이나 천국도 믿을 수가 없다.

실체가 없을 뿐 아니라 하나의 관념이거나 막연한 믿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상(日常)의 발걸음보다 빠르게 흘러가버린

날들.

이제

더 이상의 흐름을 멈추고 얼마동안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겠지.

청보리 잎사귀를 애무하던

봄날의 햇살과,

상념의 머리를 빗겨주던

가을 바람은 지금

어디쯤 흐르고 있을까?

너의 가슴 파고들던 상처보다 아프게

내게로 돌아와 박힌

내 반성(反省)의 화살촉이 뽑힐 날은 또

언제일까?

아직은 뚜렷이 남아있는

지나간 날들의 여백(餘白) 위로

다시

일상의 발걸음보다 빠르게 덫 칠 될

날들.

그래도 나는 다시 쓰리라.

아직은 끝낼 수 없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희망을!

오래 전에 필자가 썼던 "원단일기"라는 졸작이다.

인간의 본질이나 삶의 가치를 어떤 절대성이나 막연한 이념보다는 상대적 경쟁 속에서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세월 탓하지 말고, 지난 후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일 있거든 바로 실행하라, 사랑도 열심히 사는일도 그 어떤 것도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있어 가능한 것이고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욕망도 결국은 상대가 없으면 무의미 하듯이 인간의 진리는 그 상대성으로부터 창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