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집단적 히스테리에서 벗어나기
강구현 시인
어째서 내가 하면 되고, 남이 하면 안되는가?
어째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
어째서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비위(非違)는 정치적 능력으로 평가되고 싫어하는 정치인의 동일한 비위는 나쁜 것이 되는가?
어째서 호남인들은 진보적 성향이 강하고 영남인들은 보수적 성향이 강한가?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잠재되어 있는 우리의 감각은 어째서 정치적 히스테리에 송두리째 함몰되어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째서 어떤 가치에 대해 과학적 논리적 검증절차도 없이 절대 진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되고, 거기서 초래되는 군중행동의 무자비한 폭력에 휘둘리면서도 그 것을 정당화 하려 하는가?
조직적 비합리주의에 맞서야 할 우리의 이성(理性 )은 어째서 아직도 깊은 정신적 넘비(Numb)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광화문에서의 촛불과 태극기 물결의 차이는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그 가치들은 과연 영원불변의 절대적인 것이었던가?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은, 다수에 의한 합법적 폭력이 난무해도 과연 합당한 것인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에서 오직 인간이라는 종(種)에게만 허락된 "의식(意識)이라는 진화의 전리품은 자연계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점령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되었고, 그 의식을 기반으로 한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는 자신들의 역사 뿐만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생명체의 역사까지도 가름할 수 있는 절대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아-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성적 피조물이 아닌 "생각하는 갈대 Roseau pendant -파스칼"로서 지극히 우아하고 긍정적인 역사만 견인해온 것이 아니라, 조직적 폭력을 통해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노예사냥, 홀로코스트 같은 어둡고 불행한 역사까지도 자행해 왔으며, 그 부정적 행위들은 강대국들의 제3세계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지배는 물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등
현재까지도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 또한 다르지 않다.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또 한 번 자행될 보이지 않는 폭력이 예측된다.
호남에서 민주당 후보, 영남에선 국민의 힘 후보의 무조건 당선(다 그런 건 아니지만)이라는 등식의 성립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되는 것이다
이는 중앙정치집단(국회의원과 각 정당)의 탄탄한 정치적 권력기반 구축용의 선거법상 합법적 폭력이다.
그런 폭력 앞에서도 일반 유권자들은, 집단
사육되는 거대한 양계장의 닭(호남-육계, 영남-산란계. 기타지방 삼계나 오골계 등)처럼 무의식의 잠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국민은 중앙정치의 꼭두각시로 전락되고, 국론은 분열되고 국민은 정치적 피아(彼我)로 양분된 채 국가와 역사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만큼은 이 몹쓸 정치의 집단적 히스테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네편 내편 가리지 말고 적임자라면 영남에서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고, 호남에서 국민의 힘 후보도 당선시켜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지기반이 없는 지역에선 어느 정당이나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니….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집단주의 지역주의의 두꺼운 벽을 뚫고 나오려면 우선 현재 상황에 대한 유권자들의 회의(懷疑)감이 있어야 한다.
"조직적인 비 합리주의에 맞서는 이성의 선봉이 바로 회의주의이며,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 시민적 품위에 이르도록 해주는 열쇠의 하나도 회의주의이다" -스티븐 제이콜드(우리는 회의주의의 긍정적인 힘을 믿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