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률 교수의 철학이야기(328)

출세의 달인들-베이컨(2)

2024-04-01     영광신문

그런데 얼마 후 여왕의 청혼을 거절한 에식스 남작은 여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에식스는 특히 아일랜드 반란에 대한 전략을 둘러싸고 여왕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는데, 이무렵 여왕은 등을 돌린 에식스의 뺨을 내려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599년 아일랜드 총독으로 파견된 에식스는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직책을 버려둔 채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이에 여왕은 그의 관직을 뻬앗아버렸다. 에식스는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경제적으로 무너진 상태에서 200~3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런던에서 대중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이를 알아차린 베이컨이 여러 차례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러나 에식스는 끝내 반란을 추진하다가 발각, 체포되고 말았다. 베이컨은 여왕 앞에서 그를 끈질기게 변호함으로써 가출옥(수감자를 석방하는 일)으로 풀려나게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식스는 또다시 군중을 선동하여 반란군을 모아 런던으로 쳐들어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당시 검사국에 있던 베이컨은 대저택을 물려주기도 했던 은인에게 반역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구형하였고, 결국 에식스는 처형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베이컨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은망덕하다는 비난과 함께 중상모략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왕이 과연 베이컨을 그만큼 신뢰하고 있었던가? 물론 아니다. 여왕은 남작의 후원을 받는 베이컨도 불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베이컨은 스스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피고인을 엄격하게 몰아붙였다. 여왕은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베이컨은 조금의 동정심도 없이 남작에게 사형을 구형하였고, 결국 남작은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베이컨은 그와의 두터운 친분이 자신의 출세에 불리해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이 점을 오해받지 않기 위해 더욱 발 벗고 나섰던 것이다.

물론 베이컨은 사람들로부터 배은망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 참사 의원의 딸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베이컨의 사치스런 생활 때문에 몇 년 가지 못해 부인이 가지고 온 지참금마저 다 써버리고, 빚에 쪼들려 채권자들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여왕이 죽고 제임스 1(돌이 갓 지난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후계자로 지명됨)가 왕위에 오르자, 베이컨은 또다시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끊임없는 명예욕과 거침없는 활동적 성격의 소유자였던 베이컨은 검사차장과 검사장을 거쳐 검찰총장이 되더니, 1616년에는 추밀원(국왕의 자문기구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 고문관, 이듬해에는 궁정대신(왕의 최측근)으로까지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다. 베이컨은 56세 때, 옥새상서(왕의 도장을 관리하는 최측근 벼슬)로 임명된다. 지난날 자신의 아버지가 맡았던 자리, 항상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도 쉽게 오르지 못했던 자리에 드디어 오른 것이다. 이로써 베이컨은 자신이 태어났던 런던 시내 템즈강 가의 요크 하우스, 즉 옥새상서의 관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그토록 열망해마지 않았던 대법관의 자리에 올랐으며, 남작(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5등작 가운데 다섯 번째 작위)과 자작(네 번째 작위)의 칭호를 잇달아 받게 된다. 곧이어 기사 작위를 받은 베이컨은 국왕의 법률고문 자리까지 꿰차게 된다. 이 무렵, 그의 가장 주요한 저서로 평가 받는신기관론까지 출간하였으니, 그야말로 권력의 정점에서 철학까지도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게 했다고 할 수 있겠다.(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