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벨(Eugene Bell); 배유지
꿈in방 사회복지교육문화연구소 이사장 김철진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성장 뒤에는 자신의 젊음을 바쳐 미지의 땅으로 찾아온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특히 두 명문가가 있는데, 언더우드 선교사와 유진벨 선교사의 가문이 자리하고 있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가 파송했던 선교사였고, 유진벨은 미국 남장로교가 파송한 대표적인 선교사였다. 이 두 가문의 공통점이 있다면 4대째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언더우드가 1891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한 가지 목적은 한국선교에 보고였고, 다른 한 가지는 한국으로 올 선교사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내쉬빌에서 열리는 전국신학생선교연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이 호소가 영향을 주어 전킨 등 선교지원자가 생겨났고, 1892년에 남장로교 7인의 한국 첫 선교사에 뒤이어 1895년 4월 9일 유진벨 선교사는 오웬 선교사와 함께 제2진 선교사로 파송되어 내한하게 된다. 이때 유진벨의 나이가 27세, 그의 한국어 이름은 배유지였다.
필자보다 100년 전에 태어난 미국인, 그를 가슴에 담고 들여다보기 시작한지도 벌써 30년이 지나간다. 선인들에 대한 서평을 작성할 때, 그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배유지 선교사는 1868년 미국에서 태어나 1895년 한국에 도착하여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한국장로교선교공의회에서 각 교단별로 선교구역을 정했는데, 호남지역은 미국 남장로교가 담당하게 되고 미국 남장로교회는 전라도의 중심도시인 전주에서 정착을 이뤄내고 신흥학교(현, 신흥고등학교)와 기전학교(현, 기전대학교, 기전여자고등학교)를 세우고 예수병원과 전주서문교회 등을 설립한 후 전라도의 두 번째 도시인 나주지방으로 가서 사역하기로 하였는데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목포로 옮겨가 목포선교부를 설립하고 교회개척(양동제일교회)과 교육활동에 종사하였다. 이때 전남지역 최초 서양식 의료시설이 목포지역에 건립되었고 1903년에 목포 정명학교(현, 정명여자고등학교)와 영흥학교(현, 영흥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선교 활동도 시련을 맞았다. 목포에서 전도하러 출타하고 돌아오니(아마 한번 전도여행을 떠나면 한 달 이상 걸렸을 것으로 보임) 아내가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 후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전라도의 중심도시가 목포가 아니고 새로운 곳이 전라도의 중심이 될거라는 것을 의식하고 1904년에 광주로 선교부를 옮기게 되었고 광주에서 사역하던 중 미국에서 보내준 자동차를 제물포에서 받아서 내려오던 중 제암리교회(전 교인 28명을 일본이 교회에 가두고 불에 태워죽였던 사건이 있었던 곳) 사건을 조사하고 광주로 향하던 중 병점지역 기차 건널목에서 기차와의 교통사고로 두 번째 아내를 잃고 동료 선교사인 롯스 선교사는 실명을 하는 아픔을 경험하였다.
한편, 본 필자의 추론으로는 배유지 선교사가 목포에서 배를 타고 인근지역과 도서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여행을 다녔던 1902년과 1903년에 영광지역에도 기독교를 전래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 나오는 1910년까지 세워진 영광군과 주변 지역 내의 교회들을 살펴보면 영광군 관내에는 1903년 대전리교회(현, 백수읍 교회), 1904년 신천리교회(현, 묘량교회), 1905년 무령리교회(현, 영광대 교회), 1908년 염산리교회(현, 야월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는 거명되지 않았지만 1913년경에 영광에 존재했던 교회들은 덕산교회(군서), 봉산교회(백수) 그리고 포촌교회(군남)이다. 여하튼 배유지 선교사는 우리 지역 기독교 전래에도 깊은 공헌이 있다.
유진벨 선교사는 대한민국 기독교 역사, 특히 호남지역의 역사와 교회건립, 교육,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기여로 인해 존경받고 있으며, 호남지역에서의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내 기독교 교육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많은 한국인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했고 의료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여 한국 내 의료 인프라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유진벨 선교사는 한국 문화와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한국 사람들과의 상호 이해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노력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문화 교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추후 자세한 내용들을 연재하여 살펴보면서 시대의 교훈들을 찾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