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영광예술제 | 중·고등부 글짓기 수상작

글감: 공감

2024-07-01     영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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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부-동상

그 한 마디

유예린(홍농중1)

성적으로 우울할 때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한 마디면

 

친구랑 싸워서 슬플 때

걔가 잘못했네한 마디면

 

칭찬 받아서 좋을 때

미소 한 번이면

 

친구가 시비를 걸어서 짜증날 때

걔 너한테 왜 그래한 마디면

 

감기가 걸려서 아플 때

괜찮아한 마디면 되는데

 

그 한 번이……

그렇게 어려워?

 

고등부-은상

내 기억속의 꽃

김하랑(영산성지고3)

녹음이 짙어지는

이 계절이 되면,

분주히 걸어가는 사람들 속

묵묵히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

그 꽃이 생각 난다.

 

눈처럼 흩날려 세상이 흰색이 되고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촉감으로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하는 그 꽃.

 

따스한 순간은 잠시

봄비에 꽆잎지고

사람들 관심 줄어드니

이제는 흐릿해지는 존재감.

 

그러나, 주위시선 아랑곳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 나가며 푸른 잎을 반짝인다.

 

매년 4월이 되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예쁘게 지는 그꽃.

 

외롭게 혼자 지내는 그 존재를

기억하듯 바라봐 주면

더 이상 잊혀진 존재가 아니게 되겠지.

 

푸르름이 짙어가는 이 계절에

나와 같은 그 꽃이 더욱 그립다.

 

 

<수필>

중등부-금상

나에게 공감을 알려준 아이

최소민(해룡중)

세상은 고요하다. 다른사람들이 웃어도, 울어도 세상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다른사람들은 나를 자신들과는 다른사람 즉 특별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청각장애인이니까.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귀를 가지고 태어났다. 무슨말을 하는지 무슨노래를 듣는지 나는 모른다. 다른사람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공감 할 수 없었다. 이 세상도 비장애인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낸 나는 왕따였다. 자신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 무슨이야기 인지도 모르는데 공감을 어떻게하나 참 웃긴 녀석들이다. 그렇게 난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니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 큰 흠이 되었다. 친구도 사귀기 힘들고 공부도 하기 어려웠다. 어느날처럼 난 혼자였다. 제일 먼저 학교에 와서 창가자리에서 산들바람을 맞으며 앉아있을 때였다. 어떤 여자아이가 내 앞자리에 앉아 인사를 했다. 난 당황했다. 노트에 안녕이라는 글자를 써서 인사한 사람은 처음이어서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난 그 여자아이가 건넨 노트에 안녕이라고 했다. 내가 노트에 글을 적자 그 아이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었다. 그 아이의 웃음에 용기가 난걸까? 우린 노트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아이의 이름은 공나라이고, 전학생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반 모든 아이들이 나라를 반겼다. 그리고 좋아했다. 나라는 나랑 다른애다. 나를 이해 할 수 없다. 쉬는 시간이 되고 나라는 또 내 앞에 앉았다. 나라가 내 앞에 앉자 반 아이들이 순식간에 내 자리로 모여들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당황하고 있을 때 나라는 노트에 무언갈 열심히 적었다. 그리곤 보여주었다. 이제껏 자신과 친구들이 한 대화내용을 모두 적은 것이었다. 솔직히 가슴이 뭔가 간질간질 해졌다. 난생처음으로 친구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나라가 전학 온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친구도 사귀게 되었고 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친구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내가 공감을 하니 친구들은 더 신나서 말하고 나라는 또 열심히 적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공감이란 이 특별한 감정이 특별한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친구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화를 내는지를 알게되니 나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라는 고요했던 내 삶에 공감이란 빛줄기를 내려준 사람이었다. 낯선 감정들이 몰려와 내 몸과 머리를 휘감고 어지럽게 한다. 하지만 난 그것이 좋다. 나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니까 나도 어느정도 친구들의 입모양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아서 구화는커녕 입모양도 읽을 수 없었지만 이제 친구들을 사귀면서 더 내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등교를 했다. 내 친구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오니 모두 아무것도 아니라며 흩어졌다. 솔직히 조금 서운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이 왜 그러지 이제 나랑 놀기 싫은가? 모든 생각이 다 들었다. 평소와 똑같이 등교를 하는데 우리반 앞까지 오니 뭔가 분주한 느낌이 들었다. 앞문을 열어 들어가니 친구들이 케이크에 초를 꽂고 있었다. 나라는 나를 보고는 당황하더니 황급히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모두 생일 축하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종이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고깔모자를 씌워주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생에 첫 친구가 알려준 생에 첫 공감, 첫 감정들 첫 생일파티까지 난 많이 바뀌었다. 친구들 덕분에 나도 이제 평범한 사람이다. 아직도 남들이 보기에는 특별한 사람이지만 내 친구들에게는 난 평범한 사람이다. 웃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공감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고등부-은상

전환점

정예은(영산성지고1)

공생의 교육, 지속가능한 미래글로컬 미래교육 박람회 중 마이클 센델 교수님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다. 마이클 센델 교수님께서는 경쟁보다는 협동, 개인의 성취보단 공동체의 성취를 강조하셨다. 강연을 들으며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 온통 누군가와 경쟁하고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들이 생각났다. 내가 이러는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래에 크게 될 아이’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똑똑한 아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와 비교를 당하기 전까지는. 7살 때 처음으로 다른 또래 아이와 비교를 당하였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 정도가 높았어서 그런가 어린 내 눈에도 사람들의 눈빛이 점점 실망의 눈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니까 아무것도 몰랐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경쟁하며 개인의 성취를 따내기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시간이 좀 더 흘렀을까. 중학생이 되었다. 어느샌가 나는 내 의견만 고집하고 내 입맛대로 주변을 바꾸는 아이로 성장해 있었다. 그 덕분에 처음엔 많이 혼나기도 했다. 매가 약이라는 걸 들어본 적이 있다. 그 때 처음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점차 어렸을 때의 로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마 마음처럼 몸은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예전처럼 다시 돌아가는 건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한 채, 일생을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건가, 여전히 마음 한 켠에는 누군가를 견제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나를 최우선으로 하여 원하고자 하는 것을 쟁취하자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마이클 센델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고 나닌 무언가가 내 안에서 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아이들의 수준 높은 토론을 하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는 잘못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나는 경쟁보다는 협동을 우선시하며 개인의 성취보다는 공동체의 성취를 중요시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과거를 되돌아보고 인생의 전환점이 됐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고등부-동상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날들

박제연(영산성지고1)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와 했던 날들의 대한 추억이다. 영광이라는 곳에 오게 된 건 8살쯤인 것 같다.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 후 나와 동생은 잠시 외숙모 집에 머물렀다. 이때 슬프고 힘들었지만. 3살차이 나는 동생이 불안해하지 않게 최대한 감정을 숨기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외숙모 집에 초인종이 울렸고, 외숙모께서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빠가 서있었다. 아빠가 나와 동생에 이름을 불렀고, 나와 동생은 아빠의 품에 안겨 안심했다. 품에 안긴 동생과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당분간 할머니댁에서 지낼거라고 하셨다. 아빠는 우리한테 짐을 챙기라고 하셨고, 아빠는 우리를 돌봐준 외숙모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외숙모 집에 나와서 아빠차를 타고 할머니댁에 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우리를 반겨주셨다.

따뜻한 식사를 하고 잠을 잤다. 그렇게 2~3일정도 지난뒤 우리는 영광이라는 곳에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중학생이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싱했던터라 걱정이 되어서 인사말을 준비했다. 입학식 당일이 되었고, 어제 준비했던 인사말을 달달 외워 용기있게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친구들에게 연습했던 인사말을 했지만, 친구들은 내 인사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학교가 끝난 뒤 집에 와서 오늘 일을 떠올리면서 울고 있었다. 딱 마침 할아버지가 오셨다. 울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시더니, 아픈 두다리를 이끌고 다가오시더니 무슨일인지 물어보셨고, 오늘 있었떤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으신 할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면서 맛있는 과일을 입에 넣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과일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틔우고, 이 과일처럼 너랑 친구들한테도 친해지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거야라고 위로를 해주셨다. 이 말에 큰위로를 받은 후, 울었더니 피곤해서 잠을 잤다.

하지만 친구들과의 관계는 손 쓸수 없이 나빠져, 하루를 그냥 버티자는 생각만 하며 지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무기력한 시간을 지냈고, 가족들과의 소통도 줄었다.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화가 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갔고, 참 거칠고 모질었던 언행들이 가족들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느날 할아버지께서 기침을 많이 하시더니 병원에 입원하셨고, 한달뒤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큰 슬픔에 빠져 지난 날을 돌아보며 후회를 했다.

그리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에게 잘하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많이 공감되고, 그 말씀을 따르는 내가 되보려 노력한다. 또 할아버지는 마지막까지고 나에게 가족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고, 큰 선물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