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률 교수의 철학이야기(335)

출세의 달인들-하이데거(5) 제자와의 사랑

2024-07-08     영광신문

나치즘과 하이데거는 20세기의 역사와 문화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골칫거리인 바, 이 둘의 만남은 지금까지도 현대철학의 크나큰 스캔들로 남아있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한나 요나스, 한나 아렌트, 가다머, 레비나스 등의 사상가들이 정치적·윤리적인 문제에 각별히 관심을 쏟게 된 것 역시 하이데거의 과오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특히 아랜트는 하이데거의 과오를 독재자 디오니소스의 스승이 되었던 플라톤의 과오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아렌트와 하이데거는 어떤 사이인가? 독일 태생의 유대인 사상가인 아렌트는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자신을 가르치던 하이데거와 사랑에 빠졌었다. 물론 유부남이자 17살이나 연상이었던 하이데거와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훗날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없었다면, 존재와 시간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나치에 협력한 하이데거에게 환멸을 느껴, 하이델베르크로 옮겨간다. 그곳에서 실존주의 철학자인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아 논문을 썼다. 그러나 아렌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자격 취득을 금지 당했으며, 독일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도 좌절되었다. 프랑스 파리로 간 그녀는 유대계 망명자들을 돕기 위한 여러 일들을 했다. 1940년에는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결혼하였고, 1941년에는 남편,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회복한 아렌트는 청문회에서 하이데거를 위해 증언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남편의 권유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일 그녀가 하이데거와 대학 시절부터 불륜 관계였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1950년에 미국으로 귀화하였으며, 1959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등 '전체주의'에 대한 그녀의 분석은 통렬하고 탁월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유대문화 재건 기구의 의장으로도 활동하였으며, 전체주의에 대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20세기 실존철학의 거장 하이데거보다 17세나 어린 제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50여 년에 걸쳐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던 한나 아렌트. 어느 날, 69세가 된 그녀는 병상에 누워있는 하이데거 곁으로 다가간다. 하이데거의 부인인 엘프리데마저 물리친 채. 25년 만에 본 하이데거의 얼굴은 무척이나 늙어 있었고, 게다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애제자이자 사랑하는 여인을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1년에 겨우 서너 통 주고받을까 말까 했던 편지만으로도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던 스승에게, 한나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한다. “당신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날처럼,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도 알고 있죠? 신의 뜻대로, 나는 죽고 난 뒤에 당신을 더욱 더 사랑할 거예요.” 그로부터 4개월 뒤, 아렌트는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1년 뒤,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하이데거보다도 그의 라이벌(?)인 야스퍼스의 철학이 더 많은 독자를 갖게 되었다. 이해하기도 더 쉬운 데다 유럽 철학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도 야스퍼스를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그의 저서에는 독창적인 맛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그리하여 요즘에는 철학적 업적이나 그 깊이에 있어 하이데거가 더 높이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하이데거 끝, 유튜브 강성률 철학 티비운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