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포싸이트
김철진 꿈in방사회복지교육문화연구소 이사장
지금부터 115년 전, 1909년을 전후로 광주 전남을 중심으로 불꽃 인생을 살아간 배유지, 오웬, 서서평 선교사에 이어 선한 사마리아인이라 불리웠던 포사이트(Forsyte:1873-1918)에 대해 오늘은 살펴보겠다. 포싸이트는 광주에서 유일하게 서양식 의사였던 오웬이 전남 동부 지역에 순회전도중 급성폐렴에 걸려 죽게 되었을때 배유지의 전보를 받고 목포에서 활동하던 포사이트가 목포에서 광주로 오게 되는데, 이때 한번 경험한 사건 때문에 역사가 변하는 일을 겪게되는데 이게 바로 광주 길목인 지금의 효천역 부근에서 한센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발견하고 현재의 광주 양림동으로 데려온 사건이다. 바로 이 사건이 나병으로 불리던 천형(天刑)을 서양의술로 치료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선물했다.
전보를 받은 포싸이트(Forsyte:1873-1918) 선교사는 광주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길가에 방치된 한센병 환자를 발견했는데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은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걸친 누더기 옷은 피와 고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위독한 동료 선교사를 치료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그는 길을 멈추고 말에서 내려 그녀를 감싸 안아 자신의 조랑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로 들어왔다. 오웬(오기원) 목사는 이미 운명한 상태였다.
이후 포사이트는 광주 양림리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윌슨을 찾아가 그 여자의 치료와 거처를 부탁했다. 그러나 거처할 곳이 없어 고심 끝에 벽돌 굽던 가마터에 그녀를 옮겨두고 침구와 옷가지를 주어 거처하게 하고는 목포로 돌아갔다.
포싸이트의 행동에 감명받은 윌슨 선교사는 이들 환자를 치료하고 병원시설을 만들었는데, 이 일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선은 광주시민들의 항의가 심했다. 한센인들을 위한 병원은 필요하나 광주 한복판은 안 된다고 주장한 광주 사람들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한센인들을 위한 수용소를 따로 세우기로 하고 1912년 광주 효천면 봉선리에 한센병원을 세웠다. 포사이트 선교사의 선행 4년만의 결실이었다. 이곳에서 한센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센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이 사건, 곧 여자 한센병 환자를 말에 태우고 광주로 데려온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불리던 포싸이트의 헌신을 목격한 최흥종이 크게 깨닫고 내가 조선인이고 그 조선인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게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집안의 땅문서를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봉선동에 세원진 최초의 한센병 치료시설이었다. 이후 지역민들의 극력한 반대로 집단 이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여수 애양원이다. 소록도는 한참 이후인데 다음호에 언급하겠다.
봉선동의 치료시설은 1926년 조선총독부의 퇴거 명령에 따라 현재 위치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로 이전해야 했다. 병원이 옮기진 때부터 ‘애양원’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애양원 바로 뒤에는 애양원 교회가 있고 그 뒤에는 한센병 환자와 한 평생 함께 한 손양원 목사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칭송되는 포싸이트는 1873년 12월 25일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웨스트민스터 대학을 졸업한 후 1904년 한국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활동 중 괴한에게 납치되어 귀를 잘리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포싸이트는 전주에서 사역했는데, 첫 사역은 고아들을 위한 무료 의료 봉사였다. 이어서 전주예수 병원 2대 원장으로 그는 당시 말골(당시 동학혁명이 발발했던 말목장터 근방)마을에서 무장한 괴한들의 칼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료해주다가 그 역시 총칼로 무장한 괴한에게 습격당해 귀가 잘리고 측두골이 깨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풍토병에 감염되어 더 이상 활동할 수가 없게 되자 미국으로 되돌아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7년간 미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한국선교에 대한 강연과 한센병 환우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쳤다. 그러다 귀를 잘린 후유증과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1918년 5월 9일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었는데 그의 나이 45세였다. 낯설고 물 설은 곳이지만 한 사람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포싸이트 선교사는 5년간 한반도에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아와 과부 그리고 한센병 환자를 위해 목숨을 건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사역을 펼쳤다. 병든자, 노약자, 버림받은 자, 나환자를 위해 주어진 삶을 살다간 한 인생이 또 다른 교훈을 주는 이유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