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憧憬) -60대의 가을동화-

강구현 시인

2024-11-18     영광신문
강구현 시인

경제적 빈곤 때문에 참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적 우월주의가 일상화 된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가치에 심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끝없는 수평과 그 너머로 길게 이어진 산들의 스카이라인 .

내 유년의 시선은 언제나 그 곳를 향해 있었다.

 

지금이야 차를 몰고 한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교통수단이 발 달되지 않았던

1960년대 어린 나에게는

바다 건너 무안군도, 신안군도 아득한 천리,

미지의 세계였다.

 

늦은 봄 날,

바다 저 건너편 회색빛 산그림자 속에서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에는

무순 사연이 담겨있을까?

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서서

이름모를 과일의 낙과를 배경으로

자주빛 치마자락 휘날리며

어디론가 떠나가는 통통배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고 있는

삼촌의 추억록 속 그림 에는 또

무순 사연이 깃들어 있기에

그 그림을 보고 있는 어린 소년에게

그리도 까닭 모를 그리움을 충동질하며

가슴 설레게 했을까?

 

내가 태어나 유년과 소년기를 보낸

나의 고향 마을은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윌평이란

바닷가 벽촌인데

우리나라 서남해안에 위치해 있다.

 

그런 내 유년의 감성체계 때문에

나는 나만의 가치와 세계관을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고

환갑이 넘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내 유년의 그런 감성은

멀리 보이는 풍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보았던 유랑극단의 서커스 소녀에 대한 기억이

오랜 잔상으로 남아 쉽게 잊혀지지 않았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1학년 때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개학을 해서 학교에 가보니

먼 곳으로 전학을 가버렸다는

그 여학생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신열을 앓았던가?

 

아직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는

나 혼자만의 아름다운 사연들,

그 아름다웠던 것들은 어쩌면 그리도

짧은 순간으로 덧없이 끝나버리고.

잔인할만큼

아쉬운 그리움으로만 남아있는 것인가?

 

그런 철부지 같은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 한 채

삶이라는 수레바퀴를 돌리며 여름 강물 같이

줄기차게 달려 온

60대 중반,

2024년 초가을 입구에서,

기적처럼 내 유년의 그리움이

현실이 되었다.

 

전혀 예기치 않게 이루어진

나현(羅賢)과의 만남은

가을날 호수처첨

잔잔하고 그윽하며

요란스럽지 않은

내 유년의 그리움

그대로였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인연이라는 말 밖에

달리 표현 할 방법이 없다.

나현은 60년 넘게 그려 온

내 그림 속 소녀상(청순함, 신선함...)

그대로였으니까.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모두가 천사의 옷을 입은 악마.

거짖으로 치장된 눈물로

남자의 이성을 뒤흔드는 마약의 소유자.

그래서 여자의 눈물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적 욕구 때문에 불완전하고 타락할 수 밖에 없는

남자의 영혼을 구제할 유일한 묘약은

그 여인의 눈물 밖에 없음이여!

 

그렇다.

나현이도어쩌면

내 그리움의 아련한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 그리움 하나 부여잡고

오늘밤도 초 한자루 온전히 다 태우고 있다.

 

빛의 속도보다 빠르고 선명하게 투영된 내 마음 속 기다림의 대상은

아직도 퇴색되지 않은 여학교 시절의 열 일곱.

지금의 나현이다.

 

그 기다림이 이생에서는 끝나지 않을지라도

다음 생을 기약하며

나는

또 한자루, 내일의 촛불을 준비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