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만나는 곽일순 작가 지상전 - 사람
영광출신 곽일순 사진·수필 작가가 영광신문 문화사업 후원으로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듬뿍 담은 포토에세이 ‘흔적’을 출간했다. 본지는 오는 12월6일 영광문화원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에 앞서 독자들에게 작품 일부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새벽 안개는 아직 물러날 마음이 없다.
안개에 젖은 나락은 부부의 호흡에 맞춰 탈곡기로 들어가고
부부는 벌써 흰 쌀밥을 본다.
……
이후 탈곡기는 시나브로 사라졌다
곡성에서 삼베 할머니를 만났다.
피어 문 곰방대가 휴식과 조화를 이룬다.
정작 삼베 짜는 사진은 뒤로 물리고 할머니의 미소만 남겼다.
늙음이 해탈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주위엔 언제부턴지 노욕만 가득하다.
삼베 할머니의 미소가 부처다.
무엇이 이렇게 간절할까
모은 손이 거칠어서 붙지 않는다.
살짝 드러난 목의 염주가 제각각 할머니의 염원이 되어
부처를 부른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 없고
부처 아닌 부모도 없다.
읍내로 마실을 나간다.
마을 승차장의 하루 두 번 버스를 놓치면
온전히 십 리 길을 걸어야 한다.
딱히 볼일은 없지만 5일 장을 빠지면 5일을 잃는 것 같아
할멈이 풀 먹여 개켜놓은 모시옷을 둘러 입고
부지런히 대님을 졸라맸다.
따사로운 봄볕이 할아버지 등 뒤로 따라나선다.
1987년 ‘백치 아다다’라는 영화를 촬영했던 집이다.
그리고 4년 후, 두 노인의 식후 끽연 대화만 공간을 울린다.
유명 영화가 촬영되거나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은 덩달아 유명세를
타며 관광지로 등극했지만‘아다다 집’은 그냥 소실되었고 사진 속
주인도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이제 아다다 집은 영화와 내 사진의 낡은 필름으로만 남았다.
농우(農牛)는 가축이라는 이름의 가족이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엔 노비보다 오히려 비싸게 거래가 되었다.
전답을 품삯 받고 쟁기질 해주면 외수입이 제법 쏠쏠했다.
이제 쟁기는 농업박물관으로 가고
소가 맸던 멍에는 질곡(桎梏)의 대명사로 남았다.
증손자를 품에 안은 할머니의 표정이 넉넉하다.
먼 기억에서 이렇게 딸을 안았고
딸의 아들을 안았고
딸의 아들의 아들을 안았다.
피부는 거친 고목이 되었고 머리엔 서리가 내렸지만
내림 생명은 이렇게 영생으로 이어진다.
엄마는 품앗이 가며 동생을 할머니 댁에 맡겼다.
방과 후, 잠든 동생을 업고 집으로 향하는 아이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한여름 태양이 야속하다.
시골의 열 살은 때론 엄마가 되어야 한다.
위태롭게 업힌 동생의 고무신 한 짝이 벗겨질 듯 걸려있고
집으로 가는 길은 아스팔트 복사열에 자꾸만 멀어진다.
밤새 내린 눈이 길을 지웠다.
앞을 가리는 눈발을 헤치며 경로당으로 향하는 할머니의 손에 들린 검정 봉지엔 며느리가 놓고 간 먹거리가 들어있다.
다섯이 모이면 다섯 가지 음식이 만들어진다.
노인들의 유일한 겨울 먹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