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새로워지기 위해서

곽일순 수필가·사진가

2025-03-04     영광신문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계엄과 내란 그리고 탄핵이라는 세 단어에 휩쓸린 혼란의 사회를 겪으며 소중한 를 잊고 있었다. 정리의 나이에 접어든 황혼기에 무슨 사단인지 모르겠다. 거의 소진 되어가는 시간을 이상한 정치인 한 사람 때문에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서 툴툴 털고 영광신문의 창간 기념일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을 가져 보고자 한다.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에 새롭게 할 것이 있을까. 그래서 모두가 알고 있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가져와 보았다. 사람은 인생 80을 사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겹으로 살고 있다. 일간지는 매일을 쓰고 주간지는 주일을 쓰지만 어차피 독자는 하루를 읽는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날마다 달라져야 한다. 이 성어는 은나라 시조 성탕(成湯) 임금이 대야에 새겨놓고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를 반명(盤銘)이라고 한다. ()은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원래 상()나라였지만 수도가 은이기 때문에 은으로도 불렸다. 갑골문을 처음 사용했고 무역의 발달로 상인(商人/상나라 사람)은 요즘도 장사하는 사람을 뜻한다. 성탕 임금이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이 문장은 날마다 새로워야 하고 또 새로워야 한다.’라는 뜻이지만 끊임없는 발전과 변화를 말한다. 세상의 가장 무서운 적은 정체(停滯)이다. 멈추면 부패하고 교반 되지 않는 공기는 질식하게 한다. 요즘 중앙 정부의 모습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바로 정체 현상이다. 대통령은 반세기 전의 사고에 머물러 있고 측근은 주술에 길들여진 맹종자로 뇌가 경화되어 움직이지 않는 뿌리를 내렸다. 대다수는 무속 정치 운운하지만 무속과 주술은 엄연히 다르다. 현 정부는 무속보다는 일본식 주술에 가깝다. 무속은 수천 년 이어진 우리 민족의 고유 신앙이고 민속의 일부분이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이 민속으로 이어지고 민족의 신앙이 되었다. 모방은 모방을 낳으며 다양해진 모습으로 형태만 바꾸었을 뿐 민족의 마음에 자리한 무속은 겨레의 커다란 문화적 요소인 밈(MEME)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시간의 머무름이다. 새로워지는 데에 특별한 방법론은 없다. 시간 즉, 때를 아는 것이다. 중용은 시간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군자의 중용은 덕을 갖추고 때에 맞추어()에 처하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소인은 소인의 마음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행동하니 중용에 반한다. 여기서 거리낌 없음은 때를 인식하지 못함이다. 중용의 도는 때를 알고 때에 따라서 판단하며 시의적절하다. 현재 정부의 윤석열을 떠올리면 더욱 쉬워진다. 일신우일신 역시 때를 알고 행하는 중용의 도가 아니겠는가. 주희(주자)는 네 유형으로 풀어준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현명한 사람과 못난 사람이다. 지자(知者)는 앎이 지나쳐 도를 더 이상 행할 게 없다고 여기고, 우자(愚者)는 앎이 미치지 못해 행해야 할 근원을 알지 못한다. 현자(賢者 )는 행함이 지나쳐 더 이상 도를 알 게 없다고 여기고, 불초자(不肖子/못난자)는 행함에 미치지 못하므로 알아야 할 근원을 추구하지 않는다.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현명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중()은 어디일까. 중도(中道)는 마시는 물과 공기처럼 항상 우리 곁에 가까이 있지만 맛과 존재를 느끼지 못하듯이 관찰하지 못한다. 살피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용(中庸)의 중은 기울어짐이 없음이고, 용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치우침 없는 불변의 도리를 행함에는 주어진 때()를 알아야 한다. 시의가 맞지 않는 중용은 이미 중용이 아니다. 중용은 위치가 아니고 시의에 따른 도()에 해당한다. 그래서 주어진 화두가 일신우일신이다. 날마다 살피고 변화하며 새로움을 추구함에서 시의적절한 중용을 행해야 한다. 영광신문 역시 시()를 아는 중()의 길을 걷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