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년,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
곽일순 수필가·사진가
시대적 느낌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가 속한 사회는 장유(長幼)의 구분이 있기 마련이다. 불과 백여 년 전만해도 동시대에 몸을 담고 살면 어른 혹은 어린이 할 것 없이 거의 비슷한 생활과 생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격동의 시대다. 일 년의 변화가 과거 백 년을 뛰어 넘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몰아치는 변화가 반갑지 않다. 따라가기에는 나이 많은 순서대로 숨이 가쁘다. 과거에는 마을의 지혜로 존중받았던 어른이 이제 ‘퇴물’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뒷전으로 나 앉았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붙을 자신도 의지도 상실한 지 오래다. 노회한 과거 삶의 방식을 고집할 용기 또한 내려놓았다.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화석이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인류의 조상은 300~35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인류의 문명은 불과 6천 년에 불과하니 현재에 접근할수록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 짧은 6천 년의 세월을 다시 나누어도 거의 비슷한 생활을 이어 왔던 게 5천 9백 년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대와 근접한 문명을 발달시키기 시작한 시기는 불과 백 년이라는 말이고, 그 중에서도 최근 30년이다.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소름이 돋는다. 왜 3백만 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우리 세대에 폭발적인 문명의 테러가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하면 나 자신이 기적이지 않은가. 디지털과 인공지능이라는 첨단의 시대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의 뒷전으로 밀려나버린 이른바 ‘어른’이라는 개념의 세대는 희생인가 혹은 축복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호하기만 하다. 아직 열 살도 넘기지 않은 손주에게 살아 있는 화석이 되고, 스마트 폰으로 은행 일도 보지 못하는 신 문맹인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안타까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장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정치판이다. 판이란 어떤 고정되지 않은 카테고리를 가진 장소를 의미한다. 여기서 나이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정치는 넓혀서 보면 경험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첨단의 디지털 문명 혹은 인공지능 등은 정치에 직접 쓰이지 않는다. 정치는 사람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우리 정치판에는 70세 이상의 ‘어른’이 넘쳐난다. 대선이라는 잔치가 벌어지면 구시대 유물 어른까지 스멀스멀 등장한다. 물론 고른 나이의 분포는 좋은 현상이다. 문제는 나이를 잊은 욕망이다. 이를 노욕(老慾)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지만 풀어서 쓰면 원고지 열 장을 넘긴다. 나이를 먹으면 하고자 하는 의욕까지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굳이 구분하면 노욕(老慾)과 노욕(老欲)이다. 같은 의미로 쓰기도 하지만, 노인의 욕심과 의욕을 개인적으로 다르게 풀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역량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앞에 나서는 노인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욕구를 버리지 않는 노인의 구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어른의 가치를 잃은 것이고, 후자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의욕이다. 어른이란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 위치를 안다는 의미는 때를 아는 것이고, 때를 안다는 것에서 삶의 중용을 찾아야 한다. 어른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나이의 비극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문지방에 발이 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3백만 년이라는 긴 인류의 역사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동시에 겪는 유일한 세대가 아닌가. 그래서 혼란스럽지만 조금 남은 시간을 욕심으로 채우지 않고 의욕으로 채워간다면 특별한 우리 세대는 더욱 특별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시대에 어른으로 남는다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 정치판에서 노욕을 작열시키는,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부끄러운 행위는 우리에게 그대로 반면교사가 된다. 3백만 년의 마지막 경계에서 문지방을 넘는 특별한 세대가 노욕 따위에 현혹되어서야 부끄럽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