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희망의 마중물 편지 4 | ‘우리 안의 행복을 고민해봅니다’
국형진 청소년자람터 오늘 총무이사
4세 고시, 7세 고시, 그리고 초등 의대반이 우리가 사는 경쟁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매우 대표적인 이슈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4세와 7세를 위한 영재교육, 그리고 초등생을 위한 입시교육은 마치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살아오고 있다보니 우리에게는 좀 낯설은 문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도 학습능력이 높은 일부의 아이들은 선행 학습이라는 마치 희망의 신기루같이 우리 주변에 맴돌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 현실은 이미 인근지역의 도시들이나 수도권에는 당연한 일들로 여겨지며 청소년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리 이른 나이부터 우리는 선행학습을 통해 경쟁하는 아이로 기르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점점 줄어드는 취업문과 성공이라는 기회를 갖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부모의 불안이 점점 어린 나이에 점점 어려운 과제를 선행학습이라는 핑계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학대를 서슴치 않고 있다.
부모의 사랑과 형제의 우애, 친구를 사귀고 다른사람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귀한 배움의 시기에 어린이들은 외우고, 풀어내는 기술자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가 그렇게 명문이라고 생각하는 육군 사관학교출신들이 근대사를 관통하는 독재와 내란을 죄책감 없이 저지리고, 광주에서 민간인 학살이라는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할 역사의 큰 죄를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최고의 명문이라는 서울 법대 출신들이 사법독재를 이루기 위해 저지른 사건들로 내란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의대 입시에 매달리며, 나라의 미래를 꿈꾸는 이공계와 과학계는 경영계는 이미 8,90년대의 인기를 멀리 보내고 의대의 뒤를 따르는 차선책의 진로로 여겨지는 현실은 어두운 미래가 격정되는 현실인 것이다.
권력을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 선행학습을 통해 공부 전사를 만들어서 남들을 이기고 나면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 가는 것이 경쟁학습사회의 지향점이 아닌가.
우리는 자신의 성공과 권력을 지향하는 공부 기계를 기르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공동체와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 수도권과 도시지역으로 인재들이 모이는 인신공양식 교육은 더 이상 우리를 행복하게 할수 없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아이들이 지역사회를 살리는 인재가 되는 것은 옳지 않은가? 자신의 행복보도 지역 공동체와 인구소멸로 신음하는 농어촌지역을 살리는 영웅이 되어서는 않되는 것인가?
어쩌면 우리가 지향하는 도시로 가는 인재가 되어서 개인적인 성공을 하라는 것은 개인도 불행한 경쟁의 바다로 가는 꼴이며, 우리가 사는 커뮤니티와 가족에 대한 고려가 없는 매우 이기적인 방향이 될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야야 한다.
과연 가족이 우선한 행복의 조건을, 경쟁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한 노력하는 인재가 쌓여 지역의 희망을 꿈꾸는 사회를, 나라의 미세혈관 같은 지방과 농어촌지역이 건강히 회복되어 모든 농어촌지역도 희망찬 미래를.
우리는 우리 주변의 행복 조건을 볼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지역의 미래와 행복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