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률 교수의 철학이야기(356)

철학자들의 우정-마르크스와 엥겔스(2)

2025-06-02     영광신문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마르크스와 엥겔스)은 파리에서 다시 만났고, 서로의 우정을 확인한다. 이후, 엥겔스는 평생 동안 마르크스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함께 자본론집필에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엥겔스야말로 마르크스의 아내와 함께 자본론의 초고를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마르크스는 악필(惡筆)이었고, 책으로 묶어서 만들기에는 체계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조국 독일로 돌아온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집필한 공산당 선언1848프랑스 2월 혁명직전에 발표된 과학적 공산주의의 규범적인 문서로서, “인류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로서, 부르주아 계급(자본가 계급)을 쳐부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무산계급)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내적 모순에 의해 반드시 무너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 목표는 생산 수단(기계, 도구, 공장 등)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이룩해나가는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혁명은 공산당이 주도해야 하며, 그 주체는 왕이 아닌 노동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라고 하는 이 책의 마지막 구호는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이것이 문제가 되어, 마르크스는 추방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마지막 종착지인 런던(영국의 수도)으로 가 남은 인생을 보낸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평생 친구인 엥겔스는 어떤 인물일까? 마르크스보다 두 살 아래인 엥겔스는 18201128, 독일 바르멘 시에서 방적공장 경영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들을 자본가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김나지움(중고등학교 과정)을 중퇴하고 브레멘 상사(무역 및 상업회사)에서 일했다. 이 무렵 엥겔스는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착취로 고통 받는 현실을 보고, 도이칠란트 통신(뉴스를 취재하고 보급하는 언론사)에 지배계급을 비판하는 수많은 글들을 발표하였다. 1841년 엥겔스는 베를린에서 지원병으로 포병 연대에 들어갔으며,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들으며 헤겔 좌파가 되었다.

군 복무를 마친 그는 영국의 맨체스터로 건너가 영국 노동계급의 비참한 삶을 깊이 연구하였고, 차티스트 운동(18381848년 노동자들이 주동하여 전개된 영국의 민중운동) 관련자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영국의 출판물들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엥겔스의 이러한 현실 비판은 마르크스가 현실에 맞지 않는 사회주의 사상을 극복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독창적인 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에서 귀국하는 도중 파리에서 마르크스와 만난 엥겔스는 둘 사이에 확고한 우정을 유지하며, 협력을 이어나간다. 이들은 1844~1846년에 걸쳐 공동저서 신성 가족독일 이데올로기를 출판하면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토대를 쌓았다. 또 공산주의 동맹을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그 동맹의 행동 지침으로 공산당 선언(1848)을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1848년에는 독일 쾰른에서 마르크스와 함께 신라인신문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독일 라인 지방과 남부 독일에서 무장투쟁이 일어나자, 엥겔스는 직접 군사 행동에 참가하여 작전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무장투쟁이 실패한 후 런던으로 건너갔으며,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동을 적극 도왔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자본론1권을 탈고하고 생을 마칠 때까지 거의 한평생을 함께 하며 물질적으로 도왔다.(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운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