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漢字)로 풀어보는 시사
곽일순 수필가·사진가
최근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전직 대통령 부부의 특검과 관련 재판은 단순한 사법 사건을 넘어 국민의 정서 깊숙한 곳을 건드리고 있다. 법정에서 드러나는 거짓말과 체면을 모르는 행동은 실망을 넘어 ‘국민으로서 부끄럽다’는 감정을 안겨준다. 체면은 몸 ‘체(體)’와 얼굴 ‘면(面)’이 합쳐진 말로, 단순히 얼굴의 모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몸가짐과 태도를 포함한다. 즉, 사람의 품위와 도리를 지키는 태도의 합체다. 그러나 체면은 지키기 어렵다. 옷깃을 여미는 작은 자세에서부터, 위기 속에서도 절제를 잃지 않는 침착함까지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의 전직 대통령 모습은 체포를 피하려 옷까지 벗어던지는, 말 그대로 ‘체면’이 말이 아니다. 여기서 연결되는 말이 ‘창피(猖披)’다. 창피는 ‘미쳐 날뛸 창(猖)’과 ‘헤칠 피(披)’가 합쳐진 말이다. 본래 뜻은 정신을 잃고 함부로 날뛰며 체면을 해치는 행동이다. 창피란 곧 체면을 잃은 상태의 부끄러움이다. 서울구치소에서 보인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그 어원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절제와 품위는 온데간데없고, 풀어헤친 채 억지를 부리는 모습은 창피의 전형이었다.
다음은 ‘진상(進上)’이라는 단어다. 오늘날 우리는 ‘진상을 부린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지만, 본래는 임금에게 지방 특산품을 바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하급 관리들이 진상품에 손을 대고 빼돌리는 행위가 빈번해지면서 ‘진상’은 부정과 억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번 사건의 억지 주장과 왜곡된 변명은, 마치 진상품의 일부를 훔쳐 자기 주머니에 넣고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관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또 하나의 표현이 ‘양아치’다. 요즘은 불량배를 뜻하지만, 그 어원은 의외로 불교와 연관된다. ‘동냥(洞糧)’은 수행 중인 스님이 마을을 돌며 시주를 받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품행이 불량한 거지들이 떼를 지어 억지로 구걸하는 행태가 나타났고, 여기에 낮추는 접미어 ‘아치’가 붙어 동냥아치에서 ‘양아치’가 되었다. 결국 원래의 뜻은 사라지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이처럼 체면(體面), 창피(猖披), 진상(進上), 양아치(洞糧)는 서로 다른 어원을 갖고 있지만, 모두 ‘부끄러움’을 매개로 연결된다. 동양 유학의 사단칠정론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수오지심은 인간이 최소한의 도덕성을 지키는 첫 관문이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욕망은 한없이 팽창하고, 체면은 허물어지며, 결국 인격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문제는 정치 지도자의 부끄러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직 대통령의 창피는 곧 국가의 창피가 된다. 국제무대에서 그 인물이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 개개인은 직접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 부끄러움의 그림자는 국민 모두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그래서 우리는 더 큰 실망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말이 있다. ‘무애(无涯)’다. 본래는 거리낌이 없다는 긍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한없이 파렴치한 행태를 꼬집는 역설적 표현으로 쓸 수 있다. 부부가 거리낌 없이, 끝없는 사익을 취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모습이야말로 ‘무애’의 부정적 형상이다. 역사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권력을 오래 용납하지 않는다. 체면을 잃은 권위는 결국 무너지고, 창피를 모면하려는 억지는 더 큰 창피로 돌아온다. 진상을 부리며 시간을 끌어도, 국민의 기억과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양아치 같은 행태로 공적 책임을 회피하는 순간, 그 인물은 이미 지도자가 아니라 역사의 부끄러운 사례로 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