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률 교수의 철학이야기(361)
우정이 철천지 원수로-손빈과 방연(2)
앞선 제 360호에서 손빈의 말 시합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에는 세 마리 말 중에서 두 마리가 이기면 승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손빈은 이쪽 말을 상·중·하 세 등급으로 나눈 다음, 상대가 상등(上等)을 내보내면 하등(下等)의 말을 내보내 기꺼이 패배를 감수한다. 그리고 상대가 중등(中等)의 말을 내보내면 상등(上等)으로 대응하여 한 판을 이긴다. 나머지 경주는 상대의 하등(下等)과 손빈의 중등(中等)이 붙기 때문에 물어볼 것도 없이, 2승 1패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로 신임을 얻은 손빈의 보복이 드디어 시작되었으니. 위나라 경계 안으로 들어간 (손빈의) 제나라 군대는 곧장 대량(大粱, =변경, 변량. 북송의 수도. 하남 대평야의 중심지이자 교통, 상업의 중심지)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당황한 혜왕은 서둘러 회군(回軍)을 명령했다. 그리고 태자를 사령관에 임명하여 제나라 군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사생 결단을 내겠다는 심산이었다. 위나라 군대가 기세등등하게 결전에 나선 모습을 본 손빈은 겁을 먹고 후퇴하는 것처럼 꾸며, 적을 깊숙이 유인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전술에 따라 제나라 군대는 작전상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날 10만 병사의 밥을 짓는 솥을 둘째 날에는 반으로 줄였다. 셋째 날에는 3만 명분으로 줄였다. 이를 확인한 (위나라의) 방연은 제나라 군대가 겁을 먹고 있다 판단했다. 의기양양해진 방연은 중장비 부대와 보병은 남겨둔 채, 날쌘 기병만을 이끌고 제나라 군대를 쫓기 시작했다. 한편, 손빈은 위나라 군대의 추격 시간을 세밀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오늘밤이면 마릉(馬陵, 지금의 산동성 견성 동북)에 도착할 것인데, 이곳은 길이 좁고 지세(地勢)가 험한 데다 나무가 무성하여 매복에 안성맞춤이지. 게다가 나는 이곳 출신인지라, 이 일대의 지형에 대해서는 훤히 잘 알고....’
그는 이 일대에 궁사(활잡이) 1만 명을 길 양쪽에 매복시킨 다음, ‘위나라 군대가 도착하여 횃불이 타오르면, 일제히 불빛이 있는 쪽으로 화살을 날리도록’ 명령을 내려 두었다. 또 길옆에 서 있는 가장 큰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는, 그곳에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라고 써 놓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예상대로 방연이 마릉에 이르렀다. 방연은 나무에 무슨 글자 같은 것이 쓰여 있음을 발견하고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횃불을 밝히도록 명령을 내렸다. 횃불이 타오르는 순간, 화살이 그 방향으로 비 오듯 날아들었다. 일대 혼란에 빠진 위나라 군대에는 명령도, 신호도, 퇴각을 알리는 북소리도 먹히지 않았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한 방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방연은 “결국 손빈, 이 자식의 명성을 높여주는구나!”라며, 끝까지 질투의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 원한까지 풀어버린 손빈은 이후, 속세를 버리고 산야에 은둔했다. 일설로는 귀곡 선생과 함께 선계(仙界)로 갔다고도 전해진다. 1972년 산동성 임기현 은작산에서 발굴된 전한(前漢) 시대의 귀족묘에서 뛰어난 병법이 기록된 죽간(竹簡)들이 대량 출토되었다. 손무(孫武, =손자)가 지은『손자 병법』과 다른 저서『손빈 병법』인 바, 바로 이 책이 손빈이 지은 병법서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책은 전국시대 병가(兵家) 사상의 단계적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둘도 없는 자료가 되고 있다. (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 운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