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기본사회’로 가는 길
이민희 (사)여민동락공동체 이사
‘소득’ 앞에 ‘기본’이 붙어 있다. 기본소득! 단순하게 해석하면 사람이 최소한의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소득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코로나 펜데믹 시기 도래한 경제 위기 타개를 위한 해법으로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다. 12.3 내란으로 얼어붙은 서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두 차례에 나누어 민생회복 소비 쿠폰이 지급되었다. 처음에는 낯설게 여겨졌던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이 두 번의 굵직한 정책 시행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 주요 아젠다로 자리잡는 추세다. 얼마나 지급해야 하는가, 어떻게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가, 기존 복지제도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등 복잡하고 까다로운 정책적 쟁점들이 즐비하지만, ‘기본소득’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생소한 언어가 아님은 분명하다.
영광군처럼 지방자치단체 가운데서는 지역의 사회경제적 특성을 반영한 자체적인 기본소득 지급을 추진하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영광군은 에너지 공유부(共有富)를 재원으로 활용해 군민들에게 현금을 분배하는 ‘영광형 기본소득’을 추진하고 있다. ‘햇빛연금’ ‘바람연금’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영광군의 기본소득은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을 통해 얻은 공유자원의 경제적 가치를 군민들과 공유하고 조건없이 정기적인 현금 지급 방식으로 나누는 지역사회 기반 소득 보장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국가적 난제가 되어 버린 인구절벽과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고 지역사회의 재생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본소득이 순기능을 발휘할지 그 효과에 이목이 쏠린다.
지방소멸위기 지역으로 분류된 영광군을 포함하여 전국의 농산어촌이 직면한 현실은 간단치 않다. 1990년 인구 2천명 미만 읍면은 30개소(2.1%)에 불과했으나, 2023년 현재 364개로 약 31%에 달한다. 인구 유지 및 유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들 읍면지역은 머지않아 인구 1천명 이하로 감소가 예상된다. 2018년 국토교통부는 ‘기초생활인프라 국가적 최저기준’을 발표했는데, 국민 누구든지, 어디에 거주하든지 상관없이 적용가능한 보편적 생활서비스의 공급 및 지원 한계선을 표시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마을 단위 도보를 기준으로 10분 안에 기초의료시설(의원, 약국 등)과 생활체육시설(운동장, 수영장, 체육관 등), 소매점이 있어야 하고 15분 안에 초등학교와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농촌의 면 단위 중 상당수가 최저기준에서 미달하는 기초생활인프라 붕괴와 생활서비스 부재에 직면해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행한 보고서 <인구감소 농촌 지역의 기초생활서비스 확충 방안>(2022)에 의하면 농촌의 면 지역은 인구 3천명 이하가 되면 보건의료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한다. 인구 2천명 이하가 되면 상점, 식당, 세탁소, 목욕탕 등이 폐업하고 1천5백명 이하로 줄어들면 이미용실이 문을 닫는 등 생활필수시설이 사라진다. 과소화의 위기에 직면한 읍면 지역에 새로운 인구 유입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1천명 이하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일상생활의 필요를 제때 충분하게 충족하기 어려운 곳에서의 삶은 ‘난민’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이 같은 현실을 보면, 인구 문제가 곧 보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와 직결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살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곳에 인구가 유입될 리 만무하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현금을 나눠주는 개별 복지 정책 중 하나가 아니다. 농촌 지역 경제 활성화와 인프라 확장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의 동력을 확보하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데 기여한다. 궁극적으로는 수도권-도시와의 격차와 불평등을 완화함으로써 농촌을 사람 살기 괜찮은 곳으로 재구조화 하는 혁신적인 사회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이자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면서도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지만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중에서)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소설 ‘두 도시 이야기’를 발표한 것이 1859년이다. 그의 눈에 비친 당대의 모습은 두 갈래의 극단적인 상황이 대비되는 혼돈 그 자체였다. 한 세기도 더 지났으나 21세기 국내외 정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 위기, 생태 위기, 평화 위기가 중첩된 복합 위험 시대에 빛을 향해 갈 것인지, 어둠 속을 헤맬 것인지는 오직 시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회와 충격이 교차하는 가운데, 담대한 기본소득 사회 실험의 성과가 불확실성을 걷어내며 시민의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