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수졸(守拙)의 미학으로
곽일순 수필가·사진가
내 작업실 벽에 걸린 글귀가 있다. 수졸귀원전(守拙歸園田)이라는 글이다. 서예가 운암 선생의 작품으로, 글씨보다는 내용 때문에 걸어 놓은 글이다. 전원으로 돌아가서 졸렬함을 지키며 살겠다는 의미에서 아마도 느낌이 꽂힌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과 현실의 괴리를 좁힐 수 있을까. 요즘 사회는 능숙함과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빠르고, 더 똑똑하게, 더 눈에 띄게 살아가려 애쓴다. 그러나 오래전 동양의 선비들은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이 귀히 여긴 덕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수졸(守拙)’이다. 말 그대로 “서투름을 지킨다”는 뜻이지만, 그 안에는 단순한 어눌함이 아니라, 세속의 잔재주를 버리고 본연의 진실함을 지키려는 고결한 철학이 담겨 있다.
‘수(守)’는 지킨다는 뜻이고, ‘졸(拙)’은 서투르고 꾸밈없음을 뜻한다. 겉보기엔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동양의 지성들은 여기에서 역설적인 가치를 보았다. 노자 『도덕경』에는 “큰 재주는 서툰 듯하고(大巧若拙)”라는 구절이 있다. 진정한 지혜는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오히려 단순함 속에서 빛난다는 뜻이다. 장자 또한 “마음을 꾸미는 데 서투름(拙于用心)”을 미덕으로 여겼다. 이는 꾸며낸 지혜보다 자연스러운 순박함이 더 큰 도(道)에 가깝다는 인식이었다. 중국의 문인 도연명은 이 ‘수졸’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그는 벼슬길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다섯 말의 쌀 때문에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라고 했다. 세속의 영리함을 버리고 졸함을 지켜 자신을 온전히 지킨 삶이었다. 송대의 대문호 소식 또한 “차라리 서툴지언정 교묘하지 말라(寧可拙而不巧)”고 했다. 진실함은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꾸밈없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통찰은 변하지 않을 진리로 지속될 것이다.
이런 사상은 조선의 선비 정신으로 이어졌다. 퇴계 이황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늘 은둔을 갈망했다. 그는 편지에서 “졸함을 지켜 속세의 때를 피하려 한다(守拙以避世)”고 썼다. 현실적 능숙함보다 도학적 순수성을 지키는 길을 택한 것이다. 윤선도 역시 세속의 영달을 버리고 남도의 섬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며 “세상일에 졸함이 귀하다(世事拙可貴)”고 읊었다. 교묘함보다 순박함을 귀히 여긴 그의 시선은, 수졸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낸다. 다산 정약용 또한 자신을 “졸한 선비(拙士)”라 불렀다.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졸함을 편히 여기며 그 삶을 마친다(拙者安其拙,以終其身)”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결국 ‘수졸’은 세속의 영악함보다 도리와 청렴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이다. 꾸밈없이, 그러나 꿋꿋하게 자신을 지키는 자세다. 능숙한 꾀가 세상을 잠시 얻을 수는 있어도, 진심을 잃은 지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동양의 현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첨단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생각을 대신하고, 알고리즘이 인간의 판단을 앞서는 세상에서 ‘수졸’은 더 이상 낡은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철학이 된다. 서투름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무능을 자처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꾸미지 않고, 타인과 세상 앞에서 진실한 태도를 유지하는 내면의 용기다. 진짜 지혜는 화려한 말재주나 빠른 손놀림이 아니라,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퇴계가 그랬고, 도연명이 그랬듯, ‘졸함을 지킨다’는 것은 스스로를 잃지 않는 일이다. 세상은 언제나 더 교묘하고 더 영리한 이들을 원하지만, 진정한 사람은 그 반대편에 서서 묵묵히 자신을 지킨다. 그것이 바로 ‘수졸’의 길이다. 세속의 바람이 거세도, 소나무와 대나무는 스스로 숲을 이룬다. 그 숲의 고요함 속에서 깨달아야 한다. 서투름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자기 내면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