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중(嫌中), 국가가 흔들린다
곽일순 수필가·사진가
최근 한국 사회 곳곳에서 중국인을 향한 혐오가 급속히 퍼지고 있다. 서울 명동과 주요 관광지에서는 “차이나 아웃”, “CCP 아웃”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유튜브와 SNS에는 중국인 입국을 범죄나 음모와 연결하는 영상이 넘쳐난다.
혐중 정서는 단번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교류가 급속히 늘었지만, 그만큼의 불신과 경쟁의식도 함께 자라났다. 2017년 사드(THAAD) 갈등, 코로나19 팬데믹, 최근의 무비자 입국 논란은 그 불신에 불을 붙였다. 사회학자들은 이 현상을 ‘타자화의 구조’로 설명한다. 진보에 밀린 불안한 현실 속에서 외부 집단을 위험의 원인으로 설정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는 집단 본능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감정이 온라인 공간에서 폭발적으로 증폭된다는 점이다. “중국인 무비자 입국 범죄 급증”, “건강보험 먹튀”, “부동산 잠식” 같은 단정적 구호가 확산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희박하다. 경찰청과 통계청 자료 어디에도 중국인 관광객이 범죄율을 높였다는 통계는 없다. 외국인 건강보험 재정도 흑자를 기록한 해가 많고, 외국인의 부동산 보유율 역시 1%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보다 자극적인 말 한마디가 클릭 수를 끌어모으는 시대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분노를 먹고 자라는 셈이다. 법과 제도도 이런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다. 현재 한국에는 인종이나 국적을 이유로 한 혐오 발언을 포괄적으로 규제하는 법이 없다. 형법상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는 개인 단위에 국한되고, 특정 집단을 향한 증오 발언에는 적용이 어렵다. ‘차별금지법’ 논의가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 온라인과 거리에서의 혐오 표현은 사실상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국제인권규범은 국적·인종·언어를 이유로 증오를 선동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학술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혐오는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교육, 미디어 환경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불안과 경쟁이 심화할수록 사람들은 원인을 밖에서 찾는다. 그 결과 ‘중국인’은 하나의 실체가 아닌 상징적 대상이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기적인 통제보다 장기적인 인식 전환이 중요하다. 학교 교육에서 다문화 이해와 미디어 문해력을 강화하고, 대학과 연구기관이 혐오 담론의 구조를 지속해서 분석해야 한다. 물론 제도적 장치도 병행돼야 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일본의 ‘헤이트스피치 해소법’처럼, 국적·출신을 이유로 한 차별적 언동을 명확히 금지하고 피해자가 구제받을 절차를 제도화해야 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도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 조장 행위 금지” 조항을 추가해 공공장소의 혐오 선동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지자체 차원에서는 ‘혐오 대응센터’를 운영해 피해 상담과 교육 프로그램을 병행하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이다. 언론과 플랫폼의 책임도 크다. 클릭 경쟁에 밀려 혐오를 자극하는 제목과 이미지를 남발하는 행태는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린다. 언론은 사실 검증을 넘어 맥락을 설명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서술 방식을 회복해야 한다. 플랫폼 기업은 혐오 발언을 ‘표현의 자유’로 포장하지 말고, 그 경계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결국 혐중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혐중은 내일의 혐일(嫌日), 혐북(嫌北), 혐이성(嫌異性)으로 변할 수 있다. 증오가 사회의 언어로 자리 잡는 순간, 민주주의는 이미 균열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미워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묻는 시점에 서 있다. 혐오를 제도와 법, 학문과 교육이 함께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특정 집단이 아니라 결국 우리 모두에게 돌아온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분노의 확산이 아니라, 사실의 검증과 성숙한 공론이다. 혐오의 언어를 넘어, 다시 사회적 신뢰의 언어를 회복할 때다.